푸른 눈의 천사 계절과 자연광은 이미 쇠퇴해져서 정오의 햇살은 흐리고 겹겹이 쌓 아올려진 이상한 모양의 구름이 두껍게 깔려있었다. 그 조차도 단단한 유리돔을 통해서 볼수 있는 것이다. 눈을 따갑게 하는 <햇살>이라던가 물을 잔뜩 먹은 흰설탕처럼 눅 눅하게 흘러내리는 차가운 <눈>이라는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들 일까? 벨벳처럼 부드러운 밤하늘과 풍부한 산소를 머금은 황금빛의 밀밭 이 펼쳐진 홀로그램은 무건의 취향으로 질릴만큼 보고 있지만 피부 에서 땀이 솟을만큼의 강렬한 햇빛이라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차 가운 눈같은건 이제껏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자연광에 가깝게 만들어진 홀로그램의 태양빛은 시력이 안좋아 진 다는 이유로, 차가운 눈이 내리는 홀로그램은 (무슨 이유인지) 위험 하다는 이유로 무건은 일절 그런 배경은 프로그램에 넣어주지 않았 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순노부가 옆에서 <눈이란거 맛있어?> <따 가운 햇살이라는게 뭐야?>하고 까만 눈동자로 물어오면 뭐라고 대 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허둥대게 된다. 어린 순노부에게 나조차도 생소한 풍경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틈 만나면 집으로 찾아오는 사촌인 일우였다. 어린애를 앞에두고 뭔가 허황된 얘기만 잔뜩 떠벌려놓고는 아무런 뒷수습도 없이 그냥 가버리기 때문에 하루종일 순노부를 맡고있는 나는 골치가 아프다. 그러니까 순노부는 엄청나게 재잘거리는 녀석으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궁금한것이 생기면 하루종일 내 다리에 달라붙어서 나한 테서 자신이 납득할만한 대답을 얻을때까지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해대는 것이다. 올해 다섯 살이 되는 순노부는 어쩐일인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으로 도무지 행동을 따라잡을수가 없다. 침실을 제외한 방이 일곱개가 딸린 집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순노 부는 맨션 전체를 뛰어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니까 어쩌면 맨 션 한쪽 구석에 달라붙어있는 집안에서 답답해 하는건 당연한건지 도 모른다. 걷고 뛰어다니기 시작하고부터는 가끔씩 내 손을 잡아끌고 아래층 의 꽃이 만발해있는 예쁜 정원이나 무건이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준 물고기가 가득한 수족관으로 데려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나는 일일 이 무건에게 연락해서 <방을 나서는> 외출 허락을 받아야했다. 그러니까, 나는 순노부의 아버지가 되는 무건에게 하루 행동을 모 조리 다 감시당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반구형의 흐린 우유빛깔로 되어있는 화려한 건물은 도시의 최고 지 도자가 머무르는 맨션으로 외부 지역으로 통하는 리프트같은것도 없는데다 경비도 철저해서 아무리 머리를 짜낸다고해도 달아나는 행동은 할 수가 없을텐데 지치지도 않고 무건은 살고있는 맨션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했다. 방을 살짝 나와서 맨션에 딸린 정원을 둘러본다던가(그저 서서 지 켜보는 것 뿐인 풍경같은건 홀로그램을 이용하면 된다고 멋대로 말 하는 것이다.)순노부가 좋아하는 아치형의 창이 뚫려있는 (가상으로 만들어진 홀로그램 따위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전대의 지도 자였던 아버지가 큰아들인 무건을 위해 일부러 만든 것이다.)식당에 서 차를 마신다던가 하는 것도 안되었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몇번씩이나 이 집에서(정확히는 무건한테서) 달아났던> 딱지표가 붙어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살고있는 커다란 맨션 어디든 내 마음 내키는대로 다닐수 가 있었다. 몇번은 밤늦게까지 공원이나 클럽같은곳도 혼자 간적이 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행원들이 감시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혹 시 나한테 뭔가 나쁜일이 생길까봐 무건이 붙여놓은 것으로 직접적 으로 내 행동을 감시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도 모른체하고 있었 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열두살 되던 무렵에 무건이 잠자고 있던 내 몸위로 타 고 올라오면서 그런 소소한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태아를 낳는 있는 <여성>이 산소부족으로 도시형태의 거대한 유리 돔을 생각해낸 인간외에 모조리 멸종을 맞은 생물체와 함께 점차 사라지게 됐을 즈음에 진화과정의 한 영향인지 아니면 단순한 돌연 변이의 등장인지, 남성의 몸에서 태아를 대신하는 <알>이 생겨나 기 시작했다. 누구나 알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알이 생기는 체질이라 는 것이 따로 있다. 관계후 몸속에 얇은 핏덩어리의 난막을 만들어내는 남자들은 대체 로 아드레노스테론이라던가 부신피질 스테로이드의 남성홀몬 따위 가 정상치에 비해서 형편없이 낮기 때문에 음경이 작거나 성적인 자극을 받아도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는다. 외견으로도 차이가 나서, 키도 몸무게도 평균치에서 떨어지는 것이 다. (이것만으로도 알을 낳는 남자들은 진화의 과정에서 튀어나온 인간 이라기보단 단순한 돌연변이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제대로된 남자 는 그런 유약한 몸을 하고 있지 않으니까, 15세 무렵이 되면 벌써 다자란 성인의 몸을 하게 된다.) 완전히 신뢰을 잃어버릴 정도로 몇 번씩이나 무건한테서 달아나려 고 했던건 그와 관계를 갖고있던 내 몸에 알이 생길까봐 무서워서 였다. 애정의 편린따윈 조금도 없이 그저 순수한 피를 잇기 위해서- 여성 의 몸에서 얻을수 있었던 <정상적인> 태아는 이미 불가능하니까, 그나마 지도자의 순수한 혈육인 나를 이용해서 아이를 얻으려 한다 고 믿었었기 때문에 죽을 듯이 도망갈 궁리만 했었다. 좋을대로 알을 낳아주고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는건 싫었으니까, 그러니까 끈질긴 집착이나 알 수 없는 행동으로 내 행동을 감시하 고 옳아매려드는 무건의 애정같은건 손톱 끝 만큼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말없이 침대에서 다리를 벌리게 하는 남자같은건 조금도 믿을 수 없다.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몸속에 정액을 밀어넣는건 알을 바 라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나한테서 바라는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으면서 혼자 낙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몸속에 알이 생기게 되자 무건은 알 같은건 없애도 좋 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필요한건 알이 아니라 <나>라고 말해주었다. 그것으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친 형의 알을 낳아 길러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고. 태어난 것은 순노부로, 당연하게도 남자아이였다. 내가 아이였을 적에도 저런 커다란 눈을 하고 있었던건지, 하지만 순노부는 조금도 나를 닮지 않았다. 그건 정말 다행으로, 나와 무건은 같은 부모를 같고 있긴 하지만 생긴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니까 무건이 1미터 90센티가 넘는 큰 키에 딱 벌어진 골격을 가진 우수한 유전자로 태어난 반면 나는 165센티에 겨우 미치는 키 로, 해파리 시체처럼 뭔가 흐물거리는 외모에, 엷은 갈색 머리칼까 지 갖춘 최악의 열성 유전자로 태어난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연변이 열성인자는 나 하나로 족하다. 순노부는 무건을 꼭 닮았다. 순노부라는 이름은 나류,라는 내 이름을 직접 지어준것처럼 무건이 지었다. 지도자의 아이가 출생하면 아이의 유전정보를 중앙정부에 보고해야 했는데 무건은 순노부가 태어났을때 집으로 불어들인 의사에 의해 자연스럽게 채취된 순노부의 유전자 정보를 그대로 폐기하게 하고 (이건 사촌인 일우가 알려주었다.) <아직 자신의 재위기간이 충분 히 남았으니 벌써부터 다음대 지도자를 정할 생각은 없다>는 말로 정부의 입을 다물게 했다. 순노부는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저급의 형질은 조금도 섞이지 않 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당연히 내 얼굴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순노부의 유전정보를 알 수가 없으니 정부에서도 순노부의 교육을 담당하겠다고 섣불리 나서지 않았는데 무건이 순노부의 유전정보를 파기한건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말 뿐인 연합 정부의 지도자일뿐, 귀찮을만큼 사생활을 이리저리 참견해대는 중앙정부에 아들의 DNA(유전자 본체)까지 낱낱이 드러 내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류! 나는 피칸이 잔뜩 들어간 딱딱한 브라니우가 좋아. 말랑거리 는건 싫어. " 순노부는 언제나 첫 번째 음절의 발음을 세게 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눈치를 보듯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 말끝을 흐리니까 아주 약았다. 그러니까 쬐그만 목소리로 기죽은체 하면서 실컷 응석을 부리는 것 이다. 커다랗게 내 이름을 불러놓고 천진하게 요구를 말하면 안들어줄수 가 없다. 원래 식사는 하지 않아도 좋고 인간의 에너지는 <먹는것>에서 얻 어지는것이 아니라는걸 순노부도 알고 있지만 이 녀석은 딱딱한걸 이로 깨무는걸 좋아하는 것이다. 어린애는 치아가 약하기 때문에 순노부한테도 커스터드 젤리나 감 귤류의 부드러운 과일을 주는데, 보통은 그냥 얌전히 주는대로 식 탁에 있는 것을 먹지만 한번씩 빤히 자기 접시를 쳐다보면서 투정 부리거나 한다.(이 녀석도 무건처럼 먹는것에 집착하는 이상한 성향 이 있는 것이다.) 브라우니,를 브라니우로 잘못 발음한뒤 불만스럽게 뺨을 내밀고 있 는걸 보고 있자니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할지 알수가 없어서 멍하 니 식탁 너머에 앉은 녀석을 쳐다보았다. "딱딱한걸 먹으면 치아배열에 나빠. "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무건이 말한거지만 어쨌든 그렇게 설명했 다. "치아배열이 뭐야? " "이가 가지런하게 죽 놓여있다,라는 뜻이야. " 그러자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내 얼굴을 말뚱히 쳐다 보면서 아래 위의 앞니를 있는데로 바짝 드러내 보였다. 조그만 얼굴이 잔뜩 찡그려져 보여서 이상한 행동 하지마,하고 주 의를 주자 곧장, "내 <치아>는 죽 놓여져 있어. 나쁘지 않아. " 하고 말해왔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피칸이 든 브라우니는 예전에 일우가 순노부한테 선물로 가져다준 것이다. 어린애한테 딱딱한 음식은 안된다고 말해봤지만 <별거 아닌거 같 고 히스테리 부리지마>라는 말만 들었다. 그래도 무슨 생각인지 최근에는 과자를 몰래 주머니에 숨긴채 찾아 오는걸 자제하고 있어서(일우는 과자를 양 손에 잔뜩 쥔 순노부가 새끼양처럼 폴짝거리면서 기뻐하는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다.) 매번 일우가 맨션으로 찾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실 망하기를 반복하는 순노부가 가여울 정도였다. 그래도 너무 일찍 단단한 것을 먹여서 정말로 치아 배열이 안좋아 지면 턱이 비뚤어지거나 하게 될지 모르니까 큰일이다. 아무래도 무건이 돌아오면 진지하게 상의를 해보는게 좋겠다고 생 각하면서 나는 흘러나오는대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순노부는 5년전인 내가 열다섯살 때 낳은 아기다. 엷은 연지색의 점액질로 배가 부풀어 오르고 그것이 자연배출 될 때까지 열달이 걸렸다. 그건 상당히 기묘한 체험으로 실제로 어느 날, 따스한 햇빛이 좋다 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저녁무렵의 약한 햇살이 비치고 기분좋게 바람이 불어오는 홀로그램 속의 밀밭을 맨발로 걷다가 꼬물거리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을때는 어쩐지 토할것처럼 되어서 의식까지 스윽 가라앉아갔던 것이다. 소화 기능을 담당하던 복강쪽의 장기들이 퇴화되었기 때문에 <알> 은 배꼽부근에 둥그렇게 자리잡고 자란다. 조그만 태아는 불투명한 둥근 막 속에 감싸인채 물컹거리는 점액질 에 파묻혀서 그대로 흘러나왔다. 외부 환경에 적응이 되기까지 이틀정도가 걸리고, 어느 정도 시간 이 흐르면 점액질은 녹아서 붉은 물처럼 되고 그 속에 막을 찢어내 면 아주아주 조그만 아기가 하얀 손 발을 바둥거리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어느날 또렷하게 형체를 나타내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기괴한 느낌이 들어서 사실은 처음에 순노부 가 마치 비칠것처럼 약한 손발을 휘저으면서 앙앙 울어댔을때는 근 처에 가까이 갈수도 없었던 것이다. 홀로그램을 끄고 원형의 거실벽에 기대서서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 온 끈적한 점액질을 나는 마치 전혀 모르는 수상쩍은 물건인것처럼 한참을 노려보던 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무건에게 안겨서 침대로 옮 겨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무건이 대낮에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없어서 <밖에서 집안을 조사라도 하고 있었던거냐>하고 물어보자 내 말에 아무말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낳아준 모체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돌봐주지 않아도 호흡을 시작한 순간부터 자립해서, 혼자서 걷거나 말하거나 하면서 성장해 가니까, 도시안에 알을 낳는 사람들은 알을 낳는것을 <직업>으로 하고 있 는 센터의 남자들 뿐이다. 돌연변이 열성 유전자로 태어난 그들은 직업을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돔 바깥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배양센터에서 알을 낳는 일을 한다. 양육에 대한 책임도 없고 자신이 낳은 알에 애착을 가진다던가 하 는 일도 없다. 무건은 정부에서 순노부를 교육하게 하는 대신 나한테 순노부를 키 우게 했다. 어린애를 키우는 일은 정말로 까다로운 것이다. 얼굴이 새파래지도록 울거나, 기분이 좋을때도 이상한 괴성을 지르 거나 아무 기척없이 엎드려서 딸꾹질을 하거나 한다. 혹시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된게 아닌가- 어린애는 면역이 많이 약하니까, 보통은 배양센터에서 어느정도 길러진뒤에 센터를 나가 게 되지만 순노부는 태어날때부터 죽 집에서 길러진 아이니까 좀 더 유별난 건지도 모른다,하고 처음에 순노부가 딸꾹질이 멎지 않 았을때는 몇 번이나 집안을 서성거리면서 고민한 끝에 중앙 통제실 에 있던 무건에게 메시지를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으로, 평상시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무건이 비치는 모 니터 앞에서 나는 아무말도 못한채 입술만 세게 깨물고 있었다. 5분쯤뒤에 무건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평소의 무감정한 얼굴은 훨씬 더 딱딱하게 굳어져서,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노부가 아프다>고 말하자 손발을 바둥거리며 조그만 요람에 누 워있던 순노부를 안아든 무건은 아기가 딸꾹질이 멎지 않는다는 내 말에 뭔가 생각하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별안간 내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입꼬리를 말고 웃었던 것이다. (통제실에 들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하고 그날 밤에 집으로 찾아온 일우가 숨넘어갈것처럼 웃어댔을때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언 잖은 얼굴을 했지만.) 순노부가 딸꾹질이 멎지 않은건 바이러스 같은게 아니라 내가 낮에 먹인 젤리 때문이었다. "그런건 걱정 안해도 괜찮아. " 최근 무건은 수상한 웃음을 잘 짓는다. 눈을 가늘게해서, 웃는건지 아니면 뭔가 말하려고 하는건지 모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다. 치아가 약한 조그만 녀석이 단단한 음식을 좋아해서 곤란하다는 말 을 듣고 저런 표정을 떠올리다니, 게다가 대답도 수상쩍다. 따스한 물이 찰랑거리는 욕실에 몸을 담그다 나왔더니 조금 으스스 해져서 침대에 앉아 멸균한 따스한 시트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무건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웃으니까 요즘 일우가 무건을 두고 정 신이 나갔다고 하는 말도 어쩐지 조금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냥 먹고 싶어하는 것 뿐이잖아. 줄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면 녀 석도 알아들을테니까. " 괜찮다는건지 아니면 줄수 없다고 말하라는건지 알수가 없어서 물 끄러미 쳐다보자, "치아를 조심해야 하는건 너란 말이다. 하관이 아주 약하니까. " 하고 무심하게 덧붙인다. 내가 어릴 때 무건은 식사때마다 나를 불러서 옆에 앉게 했으면서 절대로 딱딱하거나 끈적거리면서 이에 달라붙는건 주지 않았다. 한창 치아가 자리잡기 시작하는 나이에 딱딱한건 안좋다는 말을 했 던 것이다. "순노부는 아직 조그맣다고요. " 녀석은 다섯 살이지만 아직 조그만 아기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무건이 이상해서,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 주고싶지 않으면 단단한 과자같은건 줄수없다고 알아듣게 얘기하고, 줘도 괜찮을 것 같으면 뭐든 먹게해도 치아같은건 조금도 다치지 않을거니까. 걱정 안해도 돼. " "순노부는 괜찮은 겁니까?" 사실은 구강질환이나 뼈의 변형같은건 보통의 평범한 인간한테는 생기지 않는, 그러니까 올곧은 유전자로 태어난 인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유전 질환>같은 것은 아닐까? 색소가 옅은 머리칼과 눈동자라던가, 평균치에 훨씬 못미치는 작은 키라던가, 단단한 근육보다 피하지방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피부라던가, 그건 날때부터 부족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관이 약한것도 그런것 때문이 아닌가? "뼈가 약한 것은 어머니 형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턱이 안좋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지.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 문에 치열이 엉망이 된거라고 생각하지만. 쓰지 않으면 약해지고 부서지기 쉽게 변한다. 어쩔수 없어." 마치 내가 생각하는걸 고스란히 읽고 있기라도 하는것처럼 아무렇 지 않게 <그런건 고민해봐야 어쩔 수 없는일>이라고 설명해준다. 빤히 쳐다보자, 새하얀 모피로 된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불쑥 일으 켜서 침대에 다리를 내려놓고 앉은 내 앞에 웅크리듯이 주저앉는 다. 순노부도 아닌데 어린애처럼 안겨지는건 조금 부끄럽다. 크고 단단한 몸이라던가, 두려움이나 고민따윈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은 단정한 생김새라던가 하는 것은 사실은 너무나 부러운 것이 다. 아무말없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남자는 오래전에 말해 준것처럼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무표정한 얼굴로는 그런 것 따위 읽을수 없지만 예전보다 말수가 늘었고, 웃기도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동자는 뭔가 미열에 감 싸인것처럼 보일때도 있다. 어린애처럼 몸에 두르고 있는 시트째로 감싸 안겨져서 입술에 따스 한 키스를 받는다. 침대에서는 귀찮을만큼 집요하게 구는 주제에 이 남자는 아직도 나 를 어린애 취급하니까 정말 곤란하다. 몸이 작은건 어쩔수 없지만 나는 이제 성인인데. 얇은 시트를 벗겨내고 몸에 걸치고 있던 욕의의 깃 사이로 커다란 손을 밀어넣어 온다. 살짝 닿을뿐이던 입술이 마치 성난것처럼 입안을 집어삼키고 있었 다. 계속 내 눈동자는 푸른색이다. 도시안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은 그러니까, 마음껏 무시하고 깔봐 도 좋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 알을 낳은 흔적을 눈에 달고 있는 남자들인 것이다. 도시안에 올곧은 남자는 알을 낳는 것따위 하지 못한다. 불완전한 유전자의 변이,일지도 모르고 아이를 낳는 모체가 모조리 사라진데 대한 인간 나름대로의 진화일지도 모른다. 유전자의 변이건 어쩔수 없는 진화건 푸른눈을 가진 남자들을 보는 시선은 상당히 차가워서, 그나마 안전한 돔밖을 빠져나가게 되면 목숨을 보장받을수도 없게 된다. 모체가 없는 이상, 알을 낳는 인간들은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존 재기 때문에 배양센터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지만 '비정상적인 인간, 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으므로 도시안의 남자들은 푸른눈을 꺼림 직해하고 기분 나빠한다. 게다가 돔 바깥으로 쫓겨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을 거부한 혜택받 은 도시에 새로운 인간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푸른눈을 가진 돌연 변이가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 잔혹하게 살해한다던가 하는 일도 생기게 된 것이다. 순노부가 태어나고 부터는 늘상 달아나려고 마음먹고 있던 돔 바깥 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돔 경계선 밖으로 동공이 찢겨져 나간 푸른눈의 남자가 발견된 적도 있는 것이다. 여 러 사람에 의해 온 몸이 너무 심하게 망가진대다 세포이상이 발견 되어서 남자는 곧 죽었고 얼마뒤에 범인은 잡히긴 했지만 수많은 범인중에 단 몇 명 뿐이었다.)어느날, 일우한테서 뭔가 돔 바깥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말을 들었을때는 조금 생경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도시 밖 인간들의 폭력이, 푸른눈을 가진 사람에 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도시 안의 인간들에 대한것으로 늘었다는 말이다. "그게 심각한 일인가요?" "도대체 무건은 너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는거냐? 훽 풀어진 바보같 은 얼굴로 -떠올려보지만 순노부가 멍청한 표정 지을때랑 똑같은 얼굴이 나온단 말이야.- 침대에서 몸싸움이나 하고 있는건가? 말이 지, 꽤 심각하다구. 그 자식은 이 곳을 무슨 비밀의 화원처럼 만드 려고 하나본데 사실은 여기야말로 도시안에서 제일 위험한 곳이란 말야. 알아서 몸조심하는게 좋아. " "돔 주변으로는 경비대가 있지 않습니까? " 이해할 수가 없어서 거대한 푸른 물결이 지나가는 아쿠아리움의 유 리에서 눈을 떼고 뒤따라 오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심각한체 떠드는 주제에 얼굴만은 즐거운 듯이 천장으로 이어진 거 대한 물고기떼를 보고 있던 일우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하고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그게.. 도시가 너무 방대해서인지, 쉽게 안으로 뚫리는 곳이 나오 더군. 지금까지 몰랐던 부분이라- 왜냐하면 외부로부터 내부 공격 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던 일이니까- 뭐가 잘못된건지 문제점을 계 속 찾아보고 있는 중이야. 게다가 위험한 무기까지 가지고 있다는 보고도 있어서.. 실은 그 놈들이 무자비하게 공격한다는건 농담 좀 해본거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건 없지. " 좋을대로 말해버리고 자신이 한손으로 떠받치듯이 안고있던, 벌써 한참전에 잠들어 버린 순노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처음에는 꽤 흥미를 갖던 빨간 옷을 입은 꼬마가 나오는 홀로그램 이 지겨워졌는지 수족관으로 내려가자고 고집을 부리던 순노부는 낮에 일우가 찾아오자 마음대로 응석을 부려 결국 아쿠아리움이 있 는 지하까지 일우를 끌고 내려와 버렸다. 나야말로 낮에 외출할때는 일우가 곁에 따라붙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지만 그래도 일우가 찾아오면 정원을 산책하거나 순노부가 좋아 하는 커다란 아치형의 창이 나있는 식당에 내려온다던가 하는것도 할 수 있었다. 바닥을 제외한 양쪽 벽과 천장이 모조리 투명한 아크릴로 감싸여져 있는 거대한 바닷속을 걷는것도, 한번도 본적 없는 바닷속이지만 아마 지금 보는것과 똑같을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무건이 순노부에게 만들어준 수족관은 엄청나게 크 다. 길게 이어진 넓은 통로의 천장과 양 옆은 염도와 산소가 가득한 해 수가 채워져 복제해서 되살린 물고기떼가 한가롭게 지나가고 있었 다. 푸른 물결이 끊임없이 얼굴위를 떠돈다. "귀엽단 말야~ 이 녀석은. 무건이 어렸을 때 이 정도로 귀여웠으면 전대 지도자는 이런 유치한 유리상자가 아니라 조그만 도시 하나를 그 자식한테 선물해줬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정말 재수없는 아들 이었다구. 맨션에 새로 생긴 그 사치스런 식당이 자기를 위해서 지 어진거라는걸 알면서도 보란 듯이 돈이 남아돌면 정부 예산에 충당 하라는 헛소리나 지껄였지. " 물끄러미 잠든 순노부를 내려다 보나 했더니 갑자기 엉뚱한 얘기를 꺼낸다. "나류! 너는 그 새끼가 왜 그랬던거라고 생각하냐? " "모릅니다. " "아아.. 넌 정말 냉정하구나. 무건이 아버지한테 반발한건 아버지가 널 부끄러워 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너한테 애정은 조금도 나눠주 지 않았지. 그게 좀 이상한 쪽으로 감정전이가 되었던 건지-- 지금 은 변태 자식이 돼버렸지만, 어쨌든 매일같이 중앙 정부에 호출당 하면서 사생활을 붙잡히는 생활을 하고 있어도 네가 외로워할까봐 틈만나면 집으로 찾아와서 너랑 놀아줬어. 기억안나? 어머니가 몸 이 안좋았기 때문에 자기도 유아시절을 혼자 보낸 주제에 말이야. 네 유전자 결함을 조사했는지 뼈가 약한 것 같다고 걱정하고 조금 이라도 먹게 해야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자기도 식사를 시작했단 말 이야. 네가 태어나기전까지 식사는 쓸모없는 체력소모라고 말하던 자식이. " 그럼, 원래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던 건가? 나 때문에 식사를 챙기는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이 녀석이 또다시 나를 놀리는건가,하고 물끄러미 일우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어쩐지 농담은 아닌 것 같다. 매일같이 농담만 하는 사람이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 되어서 내 얼 굴을 쳐다 보고 있었다. "최근 몇 년동안 정말 다른 녀석이 된 것 같단 말야. 표정,이란게 있더라구. 난 그 새끼는 원래 얼굴 표정이 없는건줄 알았어. 그런거 알아? 얼굴에 아무것도 없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 겠는거? 그런데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 들여다보이는 것 같단 말이야. 즐거워하고 있는것처럼 보여. 나류. 나는 저 자식 저런 얼굴 처음본다. 그래서, 쬐금 무섭다구. " 최근들어 무건이 정신이 나갔다고 말하더니 이제는 무섭다고 말한 다. 도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자 일우는 조금전의 진지한 표정은 순식간에 지운 장난스러운 얼굴로 바로 머리위를 지나가던 화려한 은상어 떼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말해온다. "그러니까 도시 밖의 인간들이 잠잠해질때까지 조심하라는 얘기다. 눈에 띄게 뭔가 일을 벌이지는 않고 있지만 최근에 돔이 한번 뚫린 적이 있으니까. 걱정하는대로 놈들이 정말 뭔가 조직적으로 움직이 기 시작했다면 목적은 자신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도시마다 <유리 돔>을 세운 <연합국 지도자>를 처벌하는 것일테니까, 그 전에 좀 더 다가가기 쉬운 지도자의 가족부터 공격할거란 말야. 사실은 눈 에 띄지는 않겠지만 꽤 오래전부터 맨션 주위로 경비가 훨씬 심각 해져 있단 말야. 그것도 중앙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감수하고-유전 검사 결과도 전달받지 못한 후계자랑 약해빠진 지도자의 직계 가족 은 새대가리들 생각에 쓸모없다고 결론내린 모양이야- 최고 수준의 경비대를 세워놓은 모양이지만. 거듭 말하지만, 조심해서 나쁠건 없 으니까~ 만약에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새끼는 완전히 돈단 말이 다. 확실한건 그거 하나니까. " 웃으면서 얘기하는것치곤 꽤 무시무시한 말을 한다. 정말 맨션 주위로 경비대가 들어와 있다는 말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무건은 그런 기색 같은건 조금도 내보 이지 않았다. "참, 알고만 있으라고 얘기한거야. 내가 얘기한거 알면 날 아주 죽 일라구 난리칠걸. 의리없는 치사한 자식이 말이지, 순노부한테 이상 한거 줄거면 아예 집에 찾아가지 말라고 몇 주 전에는 내 가슴에 대못을 하나 박아놨단 말야. 치사하고 드러운 새끼. 시도때도 없이 메시지 넣어서 자기 집에 다녀가라고 떠밀때는 언제고. " 짖궂게 웃으면서, 또다시 깜짝 놀랄 말을 태연하게 해댄다. 이 녀석이 최근에 과자를 들고 찾아오지 않은건 무건이 주의를 줬 기 때문인건가? 무건한테는 며칠전에 한번 얘기해본게 전부로 한번도 일우가 가져 다주는 과자에 대해서 그 전까지 얘기해 본적 없었다. 그러고보니 그저께 밤에 대화할 때, 나는 <과자>란 얘기는 꺼낸적 이 없는데도 무건은 <단단한 과자 같은건..>이라고 말했다. 딱딱한 음식은 과자 말고도 엄청나게 많다. "몇 주 전에 무건이 말이지, 조그만 녀석 둘이서 떠드는데 과자 때 문인 것 같다고 귀여워서 죽을라고 하더구만. 너 정말 히스테리 아 니냐? 그딴걸로 몇주씩이나 허비하다니... 말이지, 순노부가 내가 주 는 과자를 먹어서 성질 고약한 악당이 된다고 해도 무건이 없애려 고 드는건 순노부를 키우는 네가 아니라 내,가 될거란 말이야. 제발 참아줘라, " 앗, 언제 순노부랑 얘기하는걸 들었던건가? 당황해서 허둥거리자 일우는 재밌다는 듯이 소리내서 웃고는 <너 무 많이 자면 나류가 또 히스테리 부릴지도 몰라>라는 말 따위를 하면서 순노부를 깨우기 시작했다. 계속 "오늘 일우가 다녀간건가? " 어떻게 알았는지, 홀로그램 대신 우아한 엔틱 가구가 짜넣어진 작 은 식당에서 차를 마시던 무건이 문득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밖에서의 골치아픈 업무라던가 하는게 보이지 않을까 해서 곰 곰이 무건의 표정을 살펴보고 있던 중이었는데, 조금전까지 맞은편 에 앉아있는 순노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깜짝 놀랐다. "응, 낮에 잠깐 들렸어요. " 일우는 요즘 아무래도 일이 바쁜 모양인지 집으로 잘 찾아오지 않 고 있는데 맨션을 지키는 경호원들이 오늘 녀석이 다녀갔다는 얘기 를 무건에게 해준건지도 모르겠다. 얼마전에 알게 된거지만 일우가 맨션을 드나들었던건 무건이 부탁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심심하면 찾아와서 귀찮게 굴고 쇼핑센타에 데려가 주고 했던건 무 건이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존재감없는 사촌을 위해서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맨션으로 찾아와 시시한 농담이나 하면서 노닥거릴 이유같 은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어쩐지 너무 쓸데없이 찾아오고 출입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하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더니 일우는 그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면서 무건을 <쓸개빠진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연합 지도자의 거택지인데 허술하게 만들어지진 않았으니까, 네 가 걱정할건 아무것도 없다. " 일우가 집에 들린걸 확인하더니 이번에는 녀석이 말해주고 간 얘기 를 <걱정말라>는 말로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도대체 일우가 찾아와서 요즘 주변이 위험하다고 이야기해준건 또 어떻게 알고 있을까, 일우가 말한건가? "...위험한 무기까지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 "연합국으로 통합되고 수백년간 살상무기를 방치했기 때문에 돔 밖 의 인간들에게까지 무기가 전해진거다. 증오에 가득찬 인간이 무기 를 손에 넣게 되면 언젠가는 그 손에 피도 묻히고 싶어하지. 정찰 대를 보내서 규모를 조사중이니까 조만간 잡아낼수 있을거다. 그런 데 녀석이 그런 이야기까지 하던가? " 고개를 끄덕이자, <오늘 내내 안보인다 했더니 역시 피해 다니고 있었던 거로군>하고 혀를 찬다. 아.. 그럼 일우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나? 아니, 그보다 도시 바깥의 상황이 아직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다는 건가? 이 남자는 잠자코 앉아서 뭐든 꿰뚫어 보는 눈을 하고 있으니까 도 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는 것이다. 물끄러미 쳐다봐도, 무건은 더 이상 돔 밖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건지 맞은편에 앉아 한참 반으로 자른 동그란 호밀빵에 치즈를 바르고 있던 순노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순노부, 요즘도 덧신을 흘리고 다니니? " 자신에게 묻는것인줄 모르고 한번 더 이름을 불리고서야 <아?>하 고 고개를 든 순노부는, 손에 치즈 범벅을 하고서 말뚱히 무건을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도 신발이 없어지는거냐? " "잃어 버렸어-. " 간신히 질문내용을 이해한건지 턱에 크림을 묻힌채 아무렇게나 대 답한다. 그러고보니 순노부의 발에 덧신 한짝이 사라지고 없었다. 저 녀석은 엄청나게 물건을 잘 흘리고 다닌다. 조그만 신발이 또 어디로 간걸까, 낮에 수족관에 갔다가 떨어뜨리 고 온걸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무건은 순노부의 발을 보면서 눈썹 을 찌푸리는 내 얼굴 같은게 뭐가 재미있는건지 깨닫고보니 길죽한 눈모양을 가늘게 해서 웃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나름대로 신기한 표정이어서, 무건의 그런 얼굴을 보게 되면 나는 도무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좋을지 난감해지게 되는 것 이다. 제복을 제외한 천편일률적인 옷의 디자인은 세부적으로는 꽤 다양 한 디테일로 되어있지만 크게는 딱 두가지 모양으로 나뉜다. (일우처럼 청바지와 셔츠같은 고전적인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평범한 옷을 입는다.) 그러니까 목까지 길게 네크라인이 올라오는 옷과 어깨와 가슴 부근 이 살짝 드러나 있는 옷, 아래도 길게 발등을 덮는 디자인과 종아리 부근까지만 오는 디자인 두 종류로, 어디서건 계절의 영향을 받는일은 없으므로 겉옷은 입지 않는다. 대부분 외출시에는 제복 차림을 하니까 집안에서만 입는 옷인데, 목까지 네크라인이 올라오는 옷은 조금 불편했기 때문에 나는 팔, 다리 부분이 조금 올라가있는, 목이 드러난 옷을 입었다. 순노부한테도 같은 옷을 주었다. 대신 순노부의 옷은 가슴 부근에 셔링이 잡혀있고 소맷단에는 부드 러운 프릴이 달려있는 귀여운 것이다. 그리고 발에는 크림처럼 새 하얀 스니커를 신겨주었는데 조그만 아기용의 덧신도 있었다. "있지이~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전부 진짜가 아니래. 진짜 물고기는 바다에서 산다고 했어. " 통통 덧신을 신은 발을 굴리면서(잃어버린 한짝은 오늘 아침에 화 원에 떨어져있던 것을 경호원이 가져다 주었다.) 길다란 소파에 엎 드려있던 순노부가 불쑥 고개를 들더니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류! 바다가 뭐야? "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것처럼 눈썹을 조금 찡그리고 조그만 입 술을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다. 나름대로 진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주 아주 커다랗고 깊은 곳, 물고기가 엄청 많은 곳이야. "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언젠가 AI(인공지능) 컴퓨터가 설명해준 것 을 떠올려가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 집에 있는 수족관이 바다야? " "글쎄, 수족관은 엄청 크고.. 바다랑 비슷하긴 하지만 진짜 바다는 오염돼서 벌써 새까맣단 변해 버렸단 말야. 나쁜 냄새도 나고, 그래 서 물고기는 이제 살 수 없어." "<오염>이 뭐야? " "더러워졌다는 말. " "그럼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은 모두 어디로 갔어? " 까만 눈으로 순진하게 물어온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물고기 같은건 벌써 오래전에 다 죽어 버렸다-라고 이야기 해도 좋 을지, 그럼 <죽는다는건 뭐냐>하고 곧장 물어올게 뻔한데 그러면 <죽음>에 대해서도 얘기해 줘야하는건지, 인간은 아무리 200년 가까이 산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는다. 사실은 그 전에 큰 사고를 당하거나, 전쟁이라도 나서 수명을 끝내 기도 전에 잘못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인간이라는 생명체 자체가 멸종 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사이에 뭔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나는 순노부가 방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집중하고 있던 컴퓨터의 모니터 앞으로 얼른 고개 를 돌리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물고기 같은거 지금은 없단 말야. " 내 말에 순노부는 깜짝 놀란것처럼 몸을 일으키고는 소파를 내려와 내 무릎에 응석부리듯이 꼭 붙어서 매달렸다. "그러면~ 바다가 더러워졌기 때문에 수족관으로 온거야? 그래서 <가짜>가 된거야? 원래는 바다에 사는 녀석들이니까? " "그럴지도 모르지. " 도대체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듣고 온걸까, 생각하고 있었더니 순 노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챠피는 바다에 가본적이 없다고 했어. 그래서 내 수족관을 보여줄 까? 했더니 미안하지만 자기는 3차원 인간이라 움직일수가 없다고 울었어. " 문득 조그만 얼굴에 괴로워하는 표정을 떠올린다. "챠피가 얘기해 준거니? " "응, 챠피는 가짜 물고기지만 그래도 한번, 보고 싶다고 했어. " 챠피는 홀로그램속의 조그만 유아다. 감성이 높게 조정되어 있는지 감정변화가 다양한 녀석이었는데, 일 우가 최근에 순노부한테 선물해준 프로그램이었다. 브라우니에 대한 사과다, 라는 생뚱한 말을 넣어서. 하지만 순노부는 <브라우니에 대한 사과>라는 말을 못알아 듣고 말았다. 최근에는 그냥 먹고 싶어하는 과자를 모두 주고 있으니까 벌써 일 우가 가져다주지 않는 브라우니 같은건 새까맣게 잊은게 틀림없었 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은 몹시 더디고 어딘지 나른한 기분이 들게 한다. 분명히 깨어있는대도, 질척질척한 수면睡眠속을 걷는 기분. 최근에는 어쩐지 더 심해져서, 나도 모르게 멍하니 앉아있는 때가 많아졌다. 게다가 잠도 많아져서 하루에 두 세시간씩 하던 공부도 그만두고 있었다. 귀찮아서 욕의차림으로 아무렇게나 침대에 누워있으면 순노부가 밑 에서부터 꼬물꼬물 따스한 시트를 들추고 올라와 고개를 불쑥 내민 다. 멍하니 깨어있는 머릿속으로 모른체 해봐도 조그맣게 내 이름을 부 르고, 이름을 불러도 깨지 않으면 우니까 적당히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도 어쩐지 쉽지가 않은 것이다. 한참 달콤한 잠 속에 빠져있다가 멀리서 희미하게 순노부가 우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순노부 대신 무건이 물 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는게 보였다. "순노부는? " "자고 있어. 벌써 자정이 넘었으니까, " 분명히 아침에 일어났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잘 생각은 아니었 다) 정신이 들고보니 다시 한밤중이다. 시간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걸까, 하고 멍하니 귀를 기울려봐도 확 실히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같은건 이제 희미하게라도 들리지 않는 다. "....언제 왔어요? " "방금. " 무건의 몸이 이상할만큼 차거워서 무심코 미간을 찌푸려도 내리덮 듯이 누르고 있는 커다란 몸을 치우려고 하지 않는다. 어디를 다녀왔길래 몸이 이렇게 차가운걸까,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 온 얼굴을 만져보려고 하다가 문득 차가운 입술로 목덜미를 눌렸 다. 서두르는 손끝으로 흐트러져 있던 욕의를 벌리고 허벅지 사이로 딱 딱하게 굳어있는 것을 밀어 넣어온다. 갑자기 커다란 것이 집어 삼켜져서, 뱃속이 조금 아팠다. 미끈하게 젖은 성기로 한참 안을 헤집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나기 라도 한것처럼 문득 움직임을 멈추더니, 무건이 아무것도 안보이는 무감정한 얼굴로 입을 열고 있었다. "<바다>속에서 인간의 생체반응이 잡혔다. 머리를 쓰는 놈들이 있 었던 모양이야, 해저에 돔을 세우다니. 어쨌든 당분간 외출은 절대 안돼. " 계속 해저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돔>이 있다니 도무지 그런게 가능 하기나 한건지, 하지만 무건은 해저안에 생명체들이 있다고 말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간들이 감시가 닿지 않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살고 있었다.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두- 부족한 산소와 바이러스, 자연 증식되는 질병 속에서 살아남 은 인간들이다. 어떻게 바닷속에 인공의 돔을 세울수가 있었던걸까, 더러운 부유물로 뒤덮여 있는 바다 속에 돔을 짓는 일은 상당히 까 다로운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대량의 산소도, 늘 부족한 산소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어떻게 해저의 돔 안에 어마어마한 량의 산소를 채우는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 다. 도대체 언제부터 바닷속에 그런 것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가 없는 것이다. 애초에 무기를 가진 인간들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오염 된 바다위를 조사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해저의 도시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만든, 연방국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 의 독립된 신도시다. 모든 국가가 연방도시로 통합 되어져서, 이미 전쟁같은건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는데, 자신을 몰아낸 인간들에게 악의를 가지고 만든 도시라면 어떻게 되는걸까, 이번에야말로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무건의 몸이 차가웠던건 분명히 돔 밖을 나갔다 왔기 때문이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직접 정찰을 다녀온건 발견된 도시가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는 놈들이기 때문에 조심하라는거야, 네가 있는 곳은 아무래도 <표적>이 되기 쉬우니까. ] 낮에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다가 메시지를 받았는데, 뭔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일우가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무건이 어젯밤 돌아와서 갑자기 생각났다는 투로 던진 말같은건 모 조리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다짜꼬짜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많이 위험한 상황입니까? " [사실은 좀 애매한 상황이긴 하지만... 뭐, 자세한건 저녁에 집으로 찾아가서 이야기할 테니까. 그보다도... ] 짧막하게 말을 끊더니 일우가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너 얼굴이 왜 그래? ] "얼굴이요? " [그렇다고 갑자기 일이 터지진 않으니까 그런 얼굴 할거 없단 말 야.]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더니 다시, <새파랗 다구>하면서 자기 얼굴을 건드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어젯밤, 무건이 말해준 이야기를 이리저리 생각해보고는 있지만 사 실은 진지한 고민따위 해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마취라도 된것처럼 머릿속이 멍한채로, 벌써 며칠째 하루종일 침대속에 파묻혀서 지내고 있었다. 얼굴빛이 안좋은건 그 탓이다. 오늘도 아침부터 내내 침대에 누워있었다. [의사라도 불러줄까? ] "됐어요. 요즘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그런거니까." [무슨 일인데? ] "하루 종일 졸려서 누워있어요. " 말해놓고보니 어쩐지 혼자 태평한 기분이다. [뭐야, 그 자식? 조금쯤은 긴장을 하라고 해. 밤에 실컷 기분내고 아침마다 인상 찌푸리면서 회의실 나타나면 즐겁냐고 물어봐줘라, 나쁜자식. ] "그러니까.. 상황이 많이 안좋은 거군요. " [이따 갈거니까 그때 다시 얘기 하자구. 그리고 말이지, 나류! 제발 내가 갈때까지 몸에 뭐든 걸치고 있어줘. 그러니까.. 어린애 성교육 에도 안좋을거란 말야. 넌 순노부를 아직 쬐그만 아기라고 무진장 과잉보호를 하지만 어린애란건 금방 훌쩍 자라게 된다구. 분명히 몇 년만 지나면 널 콧웃음 치면서 내려다 보게 될걸? ]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진지하게 해댄다. "성교육이 잘못된건 하반신이 고장난 당신이라고요. 매번 사귀는 사람이 틀려지니까. " [어?? 이봐, 그건 내 하반신이 고장나서 그런게 아니라 인간이란 원 래부터 아래가 오지랖 넓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거라구. 유 별난건 내가 아니라 네 옆에 있는 그 자식이니까. ] "무건은 하반신이 아니라 머리가 조금 이상한 것 같지만... " 나만 있으면 그걸로 좋다고 말하니까, 확실히 머리쪽이 이상한 것 이다. 내 말에 일우는 갑자기 사레라도 들린것처럼 웃어댔다. 그러고보니 문득 순노부가 떠올라서, 나는 서둘러 메시지를 끊고 발가벗은 몸위에 욕의를 걸친뒤 침실을 나왔다. 오전에 잠을 깨서 부스스한 얼굴로 침실로 찾아온 순노부는 꼬물꼬 물 시트를 파고 들어와 내 팔에 조그만 뺨을 부비면서 귀찮게 칭얼 거렸다. 순노부는 조금 특이한 녀석이다. 본래는, 어린애라고 해서 특별히 응석이 심하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다. 열 살이 되기전에 빠르게 성장을 시작해서, 누구나 열 다섯 무렵이 되면 완전한 성인의 몸으로 자라게 된다. 배양센터를 나오게 되면 직업을 갖게 될 때까지 자신의 부친과 함 께 생활하게 되는데 가정에서는 양육의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혼자서 자라서 되는 것이다. 옷을 입는 것도, 말을 배우는 것도 도시안의 규칙을 습득하게 하는 일도 모두 컴퓨터가 맡아서 한다. 하지만 순노부는 컴퓨터를 어쩐지 무서워하는 것이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자신한테 말을 걸어오면, 금방이라도 울것같은 얼굴로 불만스럽게 뺨만 내밀고 있다. 거실에도, 자신의 방에도 없고 홀로그램도 켜져 있지 않아서 도무 지 어디에 있는걸까 생각하다가, 아침에 <당분간 외출은 안된다> 고 말해뒀는데 혹시 집 밖으로 나간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 다. 하지만 출입구 바깥에 늘 대기하고 서있는 수행원들도 순노부가 바 깥으로 나간 일은 없다고 말해와서,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 시 침실로 돌아왔다. 녀석은, 방금 나갔다 들어온 침실에 있었다. 그것도 내가 누워있던 침대의 반대쪽 침실 바닥에 뚝 떨어진채로,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잠을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올려서 침대에 누이자 잠시 눈을 뜨더니 내 팔에 꼭 매달려온다. 따스한 몸을 살그머니 껴안은채 나도 옆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다시 피곤하고, 머릿속은 마치 먼지라도 낀것처럼 멍하 다. 왜 이렇게 졸리고 나른한지 도무지 알수가 없는 것이다. "흐음.. 확실히 안색이 나쁜데? " 뭔가 가늠해 보는것처럼 눈썹을 모은채로 일우가 말하고 있었다. 얼굴이 너무 바짝 다가와 있어서, 겨우 잠에서 깬 머릿속으로 느릿 느릿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도무지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건지 곧장 침실로 찾아온 남자는, 침대 위로 턱을 괸채 아무렇게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혹시 알, 생긴거 아냐? " "네? "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린가 하고 멍하니 남자를 내려다보자 일우는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다시한번, <그러니까 알 말이야->하고 이번에는 아주 단정 짓는듯한 어조로 말해왔다. "그런 말도 안되는... " 바보같은 소리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조금 충격적인 기분이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그런게 생길리 없잖아요. 얼마전에 정기검진 받았을 때도 의사한테서 아무말 못들었었고, " "돌팔이 아냐? " 일우는 쭈그리고 앉아있던 자세가 영 불편했던건지 그제서야 눈썹 을 찌푸리고는 털썩, 침대 앞의 흰 소파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방금 가리킨 의사가 무건의 개인 주치의라는걸 알고 있는 주제에 아무렇게나 돌팔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알은 한 사람한테 몇 번씩이나 계속해서 생기지 않는다. 어차피 돌연변이들이 만들어 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인 것 이다. 처음 몸속에 알이 생기게 되면 숙주宿主가 되는 몸은 유전자 변이 를 일으켜서 눈동자 색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게 되는데, 한번 색이 바뀐 동공은 두 번다시 되돌아오지 않으니까 그 다음번째 알은 어 느정도 시기가 흐를때까지 존재 따위 전혀 알 수 가 없다. 연지빛의 점액질로 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를 때 즈음이면 알수 있 을까. 하지만, 두 번씩이나 알이 생기는 경우는 드문 것이다. 정말이지 이 남자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잘 도 해댄다. 머릿속이 멍한데다 어쩐지 두통까지 겹쳐서 베개에 얼굴을 다시 파 묻자, 일우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태연 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뭐, 그건 그렇고 아까 낮에 했던 이야기 말인데 사실은 일이 좀 커지게 됐다. " "...그래서 무건이 어젯밤에 갑자기 돔 바깥을 나간겁니까? " "아, 확인할게 있었기 때문에 다녀왔던거야. " "......... " "그러니까.. 그게 좀 난처하게 됐달까, " "도시 바깥의 인간들이 어떻게 해저에 새로운 돔을 세울 수 있었던 겁니까? 뭔가 다른 문제가 생긴거죠? " 쓰게 웃는 얼굴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일우는 누가 듣 는것도 아닌데 문득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어제 해저에서 발견된 도시는 확실히 연방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돔 밖으로 쫓겨난 인간들이 거주하는 곳이었어. 무건은 그 걸 확인하러 간거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 문제가 좀 더 커지게 됐단 말야. 당연히 <도시 밖의 인간>들은 해저에 대형 의 돔을 세우는 일따위 할수 없지. 그건 연방 정부의 기술자가 만 든 솜씨니까. " "...무슨 뜻입니까? " "빌어먹을 연방 지도층이 <해저 도시>에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는 소리다. 정보부에 있는 기술자들을 끌어들여서 해저에 막대한 예산 이 들어간 돔을 씌운 지도층 인간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지도자와 중앙 정부의 허락없이 마음대로 해저에 돔을 세우고 그 안으로 돔 밖의 인간들을 끌어들였어. 혜택받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동정심 만으로 중앙정부의 눈이 미치지 않는 오염된 해저에 손해를 무릅쓰 고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가는 돔을 세우는 연방국 인간 따위 어 디에도 없단 말야. 틀림없이 그 놈들 사이에 뭔가 뒷거래가 있었던 거야. 해저에 돔이 발견된건 아직 중앙정부에서만 알고 있어. 해저 에 신도시가 발견됐다는걸 다른 연방국에서 알게 되면 어디서든 뭔 가 행동을 해올테니까, 우선은 놈들에게 <돔>을 만들어준 연방국 놈들이 누구인지, 의도가 뭔지 좀더 조사하는걸로 시간을 벌어두려 고 하는거야. 아니길 바라지만 만약 돔 밖의 인간이나, 규칙을 어긴 연방국 인간들이 다같이 바라는 것이 <새로운 지도자>라면 제일 먼저 이곳이 위험해진단 말야. 가장 수를 노리기 좋거든. 제기랄, 놈들이 무기를 갖고 있는것보다 훨씬 더 위험해져 버렸어. 끊질긴 새끼들, 확실히 머리가 모이기전에 싸그리 처형했어야 했는데. " 그러니까, 돔 밖 인간들이 가진것은 살상 무기뿐만이 아니라 거대 한 해저도시와 그들에게 우호적인 연방국 인간들도 포함되어 있었 다는건가? 믿을수가 없는 일이다. 아무런 감시가 없는 죽은 해저에 돔을 만든건 분명히 중앙정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누가 만들었든 확실히 연방국 내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단순한 호의가 아닌 뒷거래,로 만들어진 도시라니, 돔 밖 인간들과 뒷거래 따위를 하는 내부의 연방사람이 있는거라 면, 어쩌면 상당히 위험할지 모른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란 놈들은 정 말 지루한걸 죽어도 못참는단 말야. " "순노부..... " "뭐? " 잊고 있었다. 분명히, 옆에 순노부가 자고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또 침대 밑으로 떨어진건가해서 허둥대면서 살펴봤지만 아니 었다. 출입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아침에 단단히 말해뒀으니까 침실에 없는거라면 분명히 거실에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잠을 깬뒤 살짝 홀로그램을 켜두고 챠피랑 놀고 있을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거실 한쪽에 딸려있는 작은 식당에 앉아 과자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방국에서 위험한 일을 꾸미는 인간들이 나왔다는 이야기 같은걸 들었다고 멍청하게 금방 불안해하고 허둥대다니, 일우가 말한것처럼 급작스럽게 나쁜일이 생긴다던가하는 일따위 없는것이다. 컴퓨터가 있는 방은 순노부가 싫어하지만, 그곳에 있는 갈색 모피 소파를 꽤 마음에 들어하니까 사실은 그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문득, 단단하게 팔을 잡혀서 뒤돌아 보자 일우가 입술을 일그러뜨 린채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류... 도대체 뭘 찾고 있는거야? "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내가 몇 번씩이나 헤집어놓은 넓은 거실은 하얀 카펫도 소파도, 테 이블도 모두 헝클어진채로 방마다 문이 활짝 열려서 내부가 환히 들여다 보이고 있었다. 찾고있던 녀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불과 몇시간만에 일어난 일이 믿을수 없어서, 헝클어진 소파에 멍 하니 앉아 거실 중앙의 스크린을 마치 실제 거실 내부를 들여다보 는 기분으로 몇 번이나 다시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쉭쉭,하고 뭔가가 숨쉬는듯한 규칙적인 기계소리에 섞여, 귀청을 뚫 을것처럼 날카롭게 울리는 고동소리, 규칙적인 기계소리는 집안으로 산소가 공급되는 소리다. 하지만 커다란 고동소리는 도무지 어디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심장소리일까, 하고 가슴에 손을 대봤지만 틀리다. 심장 소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한번도 본적없는 진지한 얼굴로 출입구 밖의 수행원들을 부르던 일 우에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중얼거리자, 일우는 그 답지않 은 조심스런 어투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까 걱정할 것 없 다>고 말해왔다. 마치,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것처럼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감싸 안아주는 것이다. 거실에 설치되어있는 조그만 감시 카메라를 확인한 것은 수행원들 때문이었다. 불과 몇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분명히 내 옆에 곤히 누워서 자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같은건 쓸데없는 걱정 때문이고, 생각해보면 순노부는 맨션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자란 녀석인 것이다. 일우가 말한 것처럼 수족관이나 화원에 간 걸지도 모르는데, 당분간 맨션을 마음대로 돌아다녀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긴 했지 만 아직 다섯 살 밖에 안된 녀석이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 같은 걸 진지하게 듣고 있었을리 없는 것이다. 수행원들에게 순노부를 밖으로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해 두긴 했지만 워낙 고집불통인 놈이니까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거실에 비치되어있는 스크린에는 몇 시간전의 집안 풍경을 보여주 는 감시 카메라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두 눈을 비비면서, 순노부가 침실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오늘 낮에 내가 잠들고 난뒤의 영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그맣게 하품하고 기분좋은 듯이 거실을 콩콩 뛰어다닌다. 제멋대로 뛰어 다니다가 곧 소파에 걸려서 넘어지고, 울면서 깨진 무릎을 들여다 보던 녀석이 잠깐 식당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양손에 과자를 들고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들고나온 과자를 빤히 내려다보던 순노부는 갑자기 뭔가 생각나기 라도 한것처럼 과자를 거실 테이블 한쪽에다 잘 두더니 다시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잠시 뒤에 나온 녀석의 발에는 새하얀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발가락을 자주 다치곤 하니까, 늘 신을 잘 신고 있으라고 평소에 말해두는 것이다. 일우가 찾아와서 몇 번이나 조심하라고 충고한건 조만간 이런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쁜일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 불시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왜 좀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상황을 우습게 보고 안이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결국 뜻밖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순노부는, 혼자서 출입구 바깥을 나간 것이 아니었다. 녀석이 아직 거실에 있을 때, 스크린으로 문득 출입구가 열리고 있 는것이 보였다. 순노부가 연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열린 것이다. 출입구 안쪽으로 들어온 남자는 과자를 손에 쥔채 자신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순노부의 까만 머리칼을 다정한 손끝으로 쓰다듬어 주 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고개를 갸웃하며 어리둥 절해하는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일어선 남자가 살그머니 손을 내밀자 순노부는 곧 과자를 테 이블 위에 올려둔채 그 손을 꼭 붙잡았다. 녀석은 남자를 올려다 보면서 생긋 웃고 있었다. 출입구 바깥으로 순노부를 데리고 나가는 남자는, 나와 꼭 닮아있 었다. 체형이나 얼굴 생김새, 눈동자 색깔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순노부를 데리고 간 것은 개체복제 된 인간이다. 오래전부터 완전히 금지된 복제 인간. 그것도 연합국의 정부에서 나온 물건인가? 해저의 도시는 연합 정부가 관여하지 않고는 지도층 인간이라 할지 라도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순노부를 데리고 간 놈은 틀림없 이 그들이 만든 실험용 인간이다. (돔 밖의 인간이 그런 것을 만들어낼수 있을리 없는 것이다.) 바깥의 수행원들도 감쪽같이 속았을만큼 완벽하게 만들어진 복제인 간이었다. 어제는 해저의 돔이 발견되고 바로 다음날인 오늘은 맨션에 복제인 간까지 들어와 버렸다. 내가 있는 곳에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인간이 태연하게 찾아온 것 이다. 중앙 정보부로 다시 돌아간 일우는 어쩐일인지 순노부에 대해서는 <이미 무건도 알고 있다>는 말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하게 했고, 완전히 지친 기분으로 컴퓨터에게 물어봐도 컴퓨터는 중앙정 부가 하는 일은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직접 무건을 찾아가서 도대체 어떻게 된일인지- 순노부는 지금 어디에 있는건지, 정찰대를 보내서 찾고는 있는건지, 내보낸 정찰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되는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집안까지 검은 제복차림의 덩치 큰 수행원들이 들어와서 더 이상 메시지도, 출입구 밖으로 나가는것도 딱딱한 얼굴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움직일 수 가 없었다. 맨션에는 외부로 통하는 통로가 없기 때문에 중앙 정보부 건물까지 가려면 에어슬랫(air slat)이 있어야 하는데 맨션에 그런건 두지 않 기 때문에 수행원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침실에 갇힌채 하룻밤을 꼼짝않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받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귓속을 울리는 고동소리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 왔다. 무건은 자정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아침이 될 때까지 머릿속 을 파고드는 고동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감금당하고 있는 생활인 것이다. 순노부가 태어난뒤부터 그런 생각같은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자유로운 곳은 집안 뿐이라고,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었 다. 마음대로 출입구를 드나들수도 없을뿐더러 혼자서는 외출도 할수 없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지내는 생활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발이 묶여 있는 상태로는 없어진 순노부를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이다. 순노부가 어디에 있는지는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어쩐일인 지 메시지 연결이 되지않고 있는 일우를 찾아가 보거나 무건이 어 디에 있는지 직접 알아보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럴리 없을텐데도 희박한 산소로 질색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목을 움켜쥔채 몇 번이고 길게 숨을 삼키고 있었다. 가장 끔찍한 생각은 그것이다. 아직 순노부를 찾지 못했다면 이미 도시 안에 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조그만 아이는 항체가 약하다. 혹시 지금까지 돔 바깥에 있는거라면,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감염 되거나 산소결핍으로 뇌에 세포이상을 일으킬수도 있다. 어제까지 곁에서 웃고 떠들던 녀석이 지금은 도무지 짐작할수조차 없는 곳에 혼자 내버려져 있다는 사실이 믿을수가 없었다. 마치 고약한 꿈을 꾸는것만 같다. 어제 일우가 찾아오기 전에, 잠든 순노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 히고 매달려오는 온기를 꼭 껴안은채 잠에 곯아 떨어졌었다. 그 뒤의 일따위 전부 꿈결처럼 흐릿해서 눈을 뜨고 있어도 깨어있 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내가 정말 꿈이라도 꾸고 있는건가?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전부 현실의 일이라는 걸까, 일우가 해준 이야기 때문에 내가 혹시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노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건은 무슨 일인지 연락조차 닿지 않 는다. 나가고 싶어도 수행원들이 집안까지 들이닥쳐서 끊임없이 내 행동 을 감시하고 있었다. 낮잠같은걸 잤기 때문에 이런 기분나쁜 악몽을 꾸는 것이다. 어린 순노부를 내버려 둔채 하루종일 태평하게 잠에 빠져있었다. 내가 멍청하게 굴었기 때문에 녀석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확실한 것은 꿈이든 현실이든 내가 보고 있는곳 어디에도 순노부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온 몸이 떨려와서 도무지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잠깐이면 되요. 물어볼 말이 있으니까. " "죄송합니다만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실수 없으십니 다. " "그럼 메시지 연결이라도 해주세요. 슬랫을 보내주던가.. 뭔가 사정 을 자세히 아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순노부가 사라진지 이틀째가 되는 날 아침, 침실에 들어와있던 수 행원에게(무건을 호위하는 남자로 몇 번 본적이 있는데 어제부터 계속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소형기를 보내달라 고 말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 히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걸 전부 말해 달라구요! 왜 메시지까지 차단시키는 거 죠? 무건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 "진정하시고 좀 앉으세요. 그래봤자 저는 아는바가 없으니까요. 메 시지는 어제 지도자께서 명령하신 일입니다. 알고 싶으신 것은 대 제께서 오시면 자연히 아시게 될 일이지 않습니까. " 조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은채 가슴에 [Ⅱ20004] 라고 조그맣게 이름표를 붙인 남자가 태연하게 말해젖힌다. "그러니까 무건이 어디에 있는건지 묻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다면 얌전히 그 사람이 있는곳이나 말해주세요! 일급 수행원이 자신이 모시는 사람의 위치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는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 키가 1미터 90센티가 넘는 인상이 험악한 남자는 내 말에 눈을 가 늘게 뜨더니 깔보는듯한 얼굴로 문득 콧웃음을 쳤다. "그야말로 일급 수행원이 저급低級유전인인 당신을 위해 밤낮으로 집 앞을 지키고 서있는 겁니다. 얼마나 상황이 위험한지 모르겠습 니까? 이곳에 수행원들이 늘어난건 최근일이 아닙니다. 맨션 주위 로는 경비대까지 세워져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복제인간 따위가 맨션의 최상층까지 올라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의 후계자까지 사라져 버렸지요. 어떻게 당신이 있는 곳에 당신과 꼭 닮은 남자가 들어올수 있었겠습니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당신한테조차, 어 떻게 이곳까지 들어올수 있었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본적은 없습 니까? 출입구 밖에서 당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감시하는 인간이 있 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지키는 수행원들까지 더 이상 믿을수 없게된 겁니다. 이제 당신이 있는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 시겠습니까? "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킵니다! 밖에 있는 인간들따위 내 알바 아 니야, 지금 위험에 처한건 내가 아니라 내 아들이라구요! 지금 당장 에어슬랫을 내주세요!" "더이상 고집 부리시면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당장이라도 수면이 필요한 듯 싶으니 말이지요. 입씨름 하고 싶지 않으니 얌전 히 침대에 누우세요. 초조해한다고 해결될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싸늘한 얼굴로 조소하고 더 이상은 상대해주지 않겠다는듯이 원래 의 딱딱하게 서있는 자세로 돌아가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머릿속이 타버릴것처럼 초조한 감정따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비 이성적으로 사고가 극단적이 되고 행동이 과격해 지는것은 몸속 의 열성인자 때문이라는걸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얼굴을 꼭닮은 인간의 손을 잡고 이곳을 걸어나간 녀석 이 혹시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심장이 오그라 붙는것처럼 되어서,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는데 그런것따위 아무래도 좋은 것 이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알수가 없었다. 알고있는 것은 감시카메라에서 본대로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외부 의 인간이 들어와 순노부를 데려갔다는 것 뿐, 왜 데려갔는지, 도무지 어쩔 생각인건지,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무래도 믿겨지지가 않아서, 세게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의사에게 수면제를 주사하게 했습니다. 오후 2시쯤에 잠드셨으니 곧 일어나실겁니다. " "...의사는 누구를 불렀나? " "<닥터 한>입니다. " 조그맣게 들리는 음성에 차츰 불유쾌한 몸이 인식이 되어서 눈썹을 찌푸렸다. 머릿속은 어지럽고 어쩐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깜빡 잠이라도 든걸까, 생각하고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쉽 지가 않았다. 닥터 한이라면 무건의 주치의다. 무건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침실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일 같은건 여태껏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 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지금이 몇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방안은 희미하게 낮춘 불빛으로 어두웠는데 문득 귓가에 차가운 손 이 닿아서 서늘한 체온에 기분좋게 몸을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무건이 침대 한쪽으로 앉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눈을 뜨자, 뭔가 생 각에 잠겨있는것처럼 무표정하게 허공을 보고있던 남자가 내 얼굴 을 돌아보고 있었다. 방안은 이미 텅비어서, 방금전에 무건과 이야기를 하던 남자가 누 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건은 제복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은채 묘하게 지친 얼굴로 아무 말없이 내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몇시에요? " "오후 8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 몸에 열이 좀 있군. " 또 너무 자버렸나.. 몸에 열이 있는건 계속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머릿속이 멍하고 전신이 괴롭다. 차갑고 커다란 손바닥이 뺨에 닿는 것이 기분 좋아서 잠시 그대로 눈을 감고 있자, 문득 무건이 이상한 말을 해왔다. "해저의 돔과 관련된 연방국을 찾아냈다. 산소부족의 미개한 땅이 라고 생각해 왔는데 돔 밖의 인간들이 연방국의 의료센타에서도 못 한일을 해버렸더군. " "....그게 뭐죠? " 내 말에 무건은 어딘지 일그러진 입가로 기묘하게 웃는 얼굴을 했 다. "병든 세포를 재생시키는 것이다. 돔을 세운 이유 자체가 산소 부 족으로 생기는 종양이나 암유발 바이러스(oncogenic virus)를 막기 위해서 였으니까, 바이러스 백신과 달리 병든 세포를 완전하게 치 료하는 신약이지. 그리고 그것으로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하 게 완전한 생명체가 되는것이고. 돔 바깥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 든 <신약>으로 연방국 놈들한테서 해저의 돔을 산거다. 약점따위 없이 보다 완전해지고 싶은건 누구나 다 똑같은 바람일테니까. "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내 뺨에서 손을 뗀 무건은 문득 얼굴을 돌린채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 조한 음성으로 다시 말해왔다. "<신약>은 중앙정부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잇속을 챙긴 연방 국 놈들도, 돔 밖의 인간들도 이제 함부로 건드릴수 없게 됐어. 놈 들이 원하는건 지도자인 나,고 요구해 오는 조건은 절대로 수락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말하고 있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몸을 조금 일으키고 무건의 팔 을 붙잡았지만 그대로 부드럽게 저지 당했다. "순노부를 데려간 것은 연방정부가 만든 <인형>이지만 돔 바깥 놈 들의 짓이야. 해저에 돔이 발견될거라는 것 따위 처음부터 놈들은 계산하고 있었던거다. 그리고 어떤식으로 행동하든 자신들이 유리 한 입장이라는것도 알고 있지. 나류, 순노부는 머릿속에서 지워라. 협상은 깨졌고 이미 녀석은 죽었어. 전부 다 끝났다." 그제서야 문득, 섬뜩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나쁜 꿈의 연속이다. 순노부가 사라지고, 무건이 돌아와서 녀석이 죽었다고 말하는 꿈. 꿈이라고는 해도, 너무나 끔찍한 것이다. 깨닫고 보니 나도 모르게 흐느끼는듯한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 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꿈은 깨지 않는다. 또다시 귓속을 부실것같은 고동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 했다. 꿈이다, 기분나쁜 꿈이다. 도무지 일어날리 없는 일을 제멋대로 이야기하는 남자따위, 홀로그 램이 보여주는 영상이다. 발화라도 할 듯이 뜨겁게 몸 속을 괴롭히는 열도, 몸안에서 들리는 커다란 고동소리도, 그리고, 축축하게 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물컹거리는 미지근한 액체 도, 그것이 점점 물처럼 번져서 새하얀 시트위를 빨갛게 물들이는것도, 몸속의 뭔가가 역류되는것처럼 콧속에서 흘러나오는 피도, 전부 다 꿈인 것이다. 도무지 현실일리 없으니까, 하루종일 계속 잠만 자니까 누군가 가상의 홀로그램으로 나를 놀리 고 있는 것이다. 이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건네다본 곳에는, 무서울만큼 새파랗게 굳은 표정으로 망연하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무건 이 보이고 있었다. 계속.. 나쁜 일은 늘 한꺼번에 일어난다. 사실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어디까지 나빠질는지 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숨쉴때마다 폐장肺臟이 뭔가 날카로운 것에 찔리기라도 하는것처럼 쑤셔온다. 눈도 떠지지 않았고 목에서는 끊임없이 쉬익쉬익,하는 기분나쁜 소 리가 났다. 어딘가 물 속 깊숙히 잠긴 것같은 이상한 부유감으로 전신이 나른 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고동은 확실히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뱃속에 알이 있었다.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그런 것이 생겨버렸다. 비상식적인 소리만 하는 남자라고 욕했었지만 일우가 말했던 것처 럼 정말로 알이 있었던 것이다. 급상승 중인 기체機體의 진동에 문득 눈을 떴을 때 다리 사이로 흘 러 내리는 그것이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연지빛을 띈 끈적한 점액이었다. 뭔가 몸속에 들어있던 내장 하나가 밖으로 흘러 떨어진 것처럼 괴 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것처럼 모세혈관이 도드라져 보이는, 길죽하고 끈 적끈적한 덩어리. 게다가, 꼬물꼬물 움직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얇고 투명한 막 안으로 언뜻 조그맣고 하얀 것이 움직이는걸 보고 나서야 겨우 <알>이라는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다. 몸을 감싸고 있는 시트도, 입가를 누르고 있는 두꺼운 면포도 온통 새빨갛게 젖은채 기분나쁘게 끈적거리고 있었다. 코와 입안으로 끊임없이 피가 고였다. 점액막 위를 뒤덮고 있는 커다랗게 부풀어오른 혈관도, 그리고 얇 은 막 속에 감싸여져 있는 아이도, 조금 이상했다. 적응기간도 없이 점액질 속에서 곧장 꼼질거리며 움직이는 아이 같 은건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순노부와 틀린 것이다. 순노부, 머릿속으로 문득 떠올린 이름에 뭔가 이상한 비명이 흘러나올것 같 아 나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꽉 눌렀다.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도 괴로움이 끝나질 않으니까, 멍하니 피묻은 손을 내려다 보았다. 꿈 따위가 아니다. 새빨갛게 손가락을 적시고 있는 피도, 숨이 멎을것같은 고통도, 너무나 어리석고, 무력하고, 가치없는 존재인 나를 조그만 손을 내밀면서 의지해 오 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서 늘 허둥대고 있었다. 언제나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보고 말하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중앙정부 기관이 들어서 있는 거대한 건물은 건물마다 천편일률적 으로 뒤덮고 있는 청회색의 유리 대신 검은 외관으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어딘지 조금 음울하게 보였다. 돔 바깥의 흐린 잿빛으로 두껍게 깔린 구름과 섞여서 더욱 기괴해 보인다. 정부기관의 높은 건물 안에서 바깥을 내려다 보는건 처음이지만 사 실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흐리고 어둡고 적막하다. 전부다 똑같이 생긴 청회색으로 반짝거리는 건물들과 텅빈 거리는 도시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으니까, 딱히 차이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거나 침대에 누워 있거나 하게 되면 뭔가 불안해서 견딜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창가에 바싹 붙어 서서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거나 하고 있었다. 이곳은 왠지 추워서 옷 위에다 욕의를 두 벌이나 더 껴입고 있었 다. 그런데도 추우니까 조금 이상한 것이다. 사흘전부터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정부 건물의 중심부 쯤으로, 넓은 집안은 검게 칠해진 건물 외관과 다르게 온통 하얀 색으로 되 어 있었다. 의료센터에서 나온후 곧장 맨션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 했지만 어쩐일인지 도착하고 보니 이 곳이었다. 그러니까 일우가 일하고 있는 정보부라던가 정찰부 라던가 하는 곳 으로 이어져있는 건물이다. 그런 혼잡한 곳의 중심지에 여유롭게 거택지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어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곳은 지도자가 머무르는 <본관>같 은 곳일지도 몰랐다. 원래 지도자는 중앙정부기관에 속해진 곳에서 지내게 되어있다. 수족관이 있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맨션은 전대의 지도자인 아 버지가 어머니를 위해서 사치를 부려서 지은 곳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무건도 나도 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야 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사실은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 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되돌아 온다고 해도 이곳에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애초에 열다섯살이 되었을 무렵에 돔 밖으로 나갔어야 했으니까. 키도 몸도 평균치에 훨씬 못미치는 형편없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 났다. 그런 몸으로는 알을 낳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대로 한다면 사실은 나는 배양센터 같은곳에서 생활하거나 돔 바깥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뭔가 기괴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무건이 나를 좋다,고 말해준 때부터, 순노부가 태어나고 그 녀석이 옆에서 귀엽게 웃고 말하던 때부터일지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달아날 수 없는 현실이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 스럽게 지나간 일따위 전부다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지나간 것은 꿈처럼 사그라들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흔적조차 남 지 않게 되었다. "무건은 요즘 어떻게 지내? 통제실에만 쳐박혀서 회의에도 잘 나타 나지 않으니까 위원회에서 말들이 많다구. " 낮에 갑자기 출입구를 열고 나타난 일우는 거실 중앙에 놓인 새하 얀 원형 테이블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턱대고 무건에 대한 이야 기를 꺼내고 있었다. 순노부에 대한 일을 알아보려고 몇일동안 정신없이 찾았던 남자였 는데 마치 고의적으로 피하는듯이 행동해 놓고 그런 일따위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태연히 다시 나타난 것이다. 순노부에 대한 일을 누구보다도 잘 알텐데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평스런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런 얼굴을 대하자 정말 지난 며칠동안의 일같은건 전부다 사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말없이 천천히 걸어 들어와서 의자에 앉아 무건에 대한 말을 꺼내는 모습까지 창가에 붙어선채 찬찬히 보고 있었더니 녀석은 문 득 한숨을 내쉬고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다. "괜찮아? " "뭐가 말입니까? " "그러니까... 불가항력이라는게 있는거란 말야. 어쩔 수 없는게 있다 구.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됐어. 그러면 도리 없는거잖아. " "원래대로 돌아간 것 뿐이니까 괜찮습니다. " 내 말에 일우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가를 찌푸렸다. "무건이 어떻게 지내는지 같은거 저도 몰라요. 이곳으로 오지 않으 니까. "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이리로 와서 좀 앉아봐. " 정말로 이곳에는 오고 있지 않는데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는 내가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자 불쑥 손을 내밀어서 내 얼 굴을 만졌다. "뭐야, 차갑잖아. " "....정말 이곳으로는 전혀 오고 있지 않으니까 저한테 물어봐도 모 릅니다. " "원래대로 돌아간 것 뿐이라는건 무슨 소리야? " "............ " ".....무건은? " "그러니까 이곳으로는 오고 있지 않다고... " "너한테 뭐라고 말했어? " "순노부에 대한 일 말입니까? " "그래. " "협상이 깨졌다고 하더군요. " "그리고? " ".......손을 써볼 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 "제기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놈인지 모르겠구만. " 이것저것 캐묻고는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 었다. "뭐, 나도 당분간은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만 위원회에서 말들이 많 으니까 곤란하다구. 별 도움도 못되는 놈들이 시끄럽기만 해서.. 뜻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지도자 자질>운운하면서 멋대로 떠들 어 대고 있단 말야. " 지친 표정을 떠올리고는 아무렇게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말한 다. "아무래도 걱정되서, 맨션까지 헛걸음하고 오는 길이야. 어지간히 이곳이 마음에 안드는 모양인지 그나마 지금은 <본관>이 제일 안 전할 거라고 했더니 새끼가 아주 질색을 하더구만. 결국엔 그냥 이 곳에다 머물게 할거였으면서 유난스런 자식이라니까. " 역시, 이곳이 본관이었던 것이다. "불쌍하니까 너무 괴롭히지는 마. 내가 아주 난리를 쳐줬단 말야. 중앙 정부에서는 미확인된 유전자를 갖고 있는 후계자한테 별로 미 련이 없는 것 같으니까 어떻게 해볼수도 없어. 해저에 수상한 돔이 발견됐는데도 아무도 조사에 관한 말을 안하니까, 그냥 잠자코 주 시하고 있을 뿐이지. 뭔가 득이 되는거라면 뭐든지 용납할 개자식 들이야. " 고개를 숙인채 잠자코 듣고 있자 문득 일우가 손가락 끝으로 테이 블 위를 소리내서 두드리고 있었다. 뭔가 해서 쳐다보자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어쩐지 괴로운것처럼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실은 무건이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온거야. 너는 뭐랄까, 좀 특별 나니까 말이지. 보통은 너처럼 아이를 키우는 인간들은 없단 말이 야. 아이를 양육해서 사회로 되돌려 보내는 일은 실적에 플러스가 되니까 하는 것 뿐이지만... " 태평스러운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집안에 들어온후 부터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건이 말한것처럼 순노부는 정말로 죽은 것이다. 복제인간과 함께 돔 밖을 나간후 며칠을 산소부족인 상태로 지내다 가 죽었다. 무건은 단 한번도 순노부가 있는 곳에 가지 않았다. 협상이라고 한 것은 돔이라는것을 만든뒤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 을 밖으로 쫓아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병들어 죽게한 연방 지도 자들을 대신해서 무건을 지금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돔 밖 의 인간들은 다음대 후계자가 될지 모르는 순노부를 데려다가 무건 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한 것 같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순노부가 죽었으니까. 그게 끝이다. 순노부의 성장은 다섯 살에서 영원히 정지된채로 원래대로 돌아오 는 일따위 두번다시 없을 것이다. "나류, 당분간은 불편하더라도 여기서 지내야 돼. 새로운 맨션을 만 들고 있으니까. 그런데 내 취향에도 이런 모형같은 집은 정말 싫구 만." 주위를 둘러보면서 아무렇게나 말한다. "그래도 너는 어딘지 꽤나 어울려 보이긴 하지만.. 뭔가 온기같은 것이 없달까, 그런 얼굴로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파지니까 좀 더 성질을 부려도 난 좋은데 말야." "저는 괜찮습니다. " 무심하게 대꾸하자 한참을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일우가 어깨를 으쓱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에 다시 올게. 출입구 밖에 있는 놈한테 차를 가져오게 할테 니까 좀 마시고 자라. 얼굴이 아직 안좋아. " "저는 괜찮으니까 신경 안써도 되요. " "말이지, 나류..... " 출입구 쪽으로 돌아서려다가 뭔가 망설이는 것처럼 멈칫하고는 문 득 입술을 일그러뜨린 이상한 얼굴로 웃어 보인다. "무건은 정말로 그게 최선이었어. 저도 꽤나 괴로울거란 말야. 완전 히 미친새끼처럼 통제실 안에만 쳐박혀 있어. 아무도 만나주지 않 는다구. 위원회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를 직접 교육시키겠다고 말하 고 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까.. 평소 같았으면 어림없는 일 이란 말야. 그런데 아이는 정말 저대로 내버려둘 참이냐? " 새로 태어난 아이라니.. 하고, 잠시 생각해 보다가 그제야 맨션에서 의료 센터로 이동중일 때 흘러나온 <알>이 생각났다. "무건의 아이 말입니까? " "며칠전에 너한테서 나온 아이 말야. 정부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 이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그 녀석은 위원회 쪽에서 키워 지게 될지도 몰라. 그.. 순노부의 경우는 무건이 유전자 정보를 제 대로 알리지 않은 바람에 어쩔수 없었지만 이 녀석은 곧장 의료 센 터로 들어가 버려서 유전정보가 고스란히 위원회 놈들한테 넘어가 버렸단 말야. 성장기형이긴 하지만 유전자는 아주 완벽해. 어차피 이제 하나뿐인 후계자니까 정부에서 욕심 내는것도 무리는 아니 지." ".....성장기형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 "몰랐어? " "못들었습니다. " "그러니까.. 말그대로 성장기형成長畸形의 돌연변이다. 알에서 나온 지 이제 일주일도 안됐는데 말하고 걷고 있다고. "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수 없어서, 눈썹을 찌푸리고 있자 일우가 문득 생각난것처럼 말했다. "그러고보니 어떻게 알았는지 그 녀석이 네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있다더군. 기주寄主에 대한 개념이 없을텐데 확실히 이상한 놈이란 말야. " [새끼 염소가, 별이 반짝일때, 움,움~하고 조그만 발로 출입구를 두 드려요~] [움,움이 뭐야? ] [그건 새끼염소가 내는 목소리 같은거야.] 소파에 엎드려 노래를 부르다 말고 순노부가 이쪽을 보면서 생끗 웃으며 대답했다. [새끼염소가 그렇게 우는거냐? ] [응. 다급할때는 움움, 하고 두번 울어.]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조그만 발을 흔들면서 다시 노래를 부르 기 시작했다. [별이 반짝일 때, 새끼 염소가, 문을 콩콩 두드려요, 배가 고파서 움,움~하고~ 그러니깐, 새끼염소는 배가 고파서 집으로 돌아가는거 야. 밤이 되면 배가 고프거든.]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생각난것처럼 설명을 덧붙인다. [배가 고파? ] [응. 그리고 바깥에 오래 있으면 나쁜 병에 걸릴지 모르니까 조심해 야 돼. ] [그런 얘기도 챠피가 해주는거니? ] [으응, 무건이 얘기해 줬어. 돔 바깥은 <세균>이 많기 때문에 조심 하는거야, 새끼염소처럼. 있지이~ 사실은 염소는 메에~하고 울어. 그치만 새끼염소는 쬐그마니깐 움,하고 재채기처럼 우는거야. 이건 챠피가 말해준거지만 엄청 하얗고 쬐그만 녀석이래. 이 녀석은 눈 은 까맣고, 이렇게 머리위로 귀가...] 잠결에, 순노부의 목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자 노래 소리는 점차 조그맣게 멀어져서 어느틈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매일 똑같은 꿈의 연속이다. 이제는 실제로 순노부가 그런 노래를 불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 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아침의 흐린 햇살이 들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참을 창밖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시트에 얼굴을 파묻은채 조금전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를 기억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자, 어쩐지 명치끝이 아파와서 한참동안 숨을 쉴수가 없었다. 계속.. <악성형질>이라는건 점점 더 고약하게 외모를 변화시킨다. 머리카락의 색이 연한 황갈색으로 옅어지고 눈동자도 어쩐지 예전 보다 좀더 진한 푸른 빛깔을 띄고 있었다. 몸속에서 원래의 색소가 점차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욕조에 앉아 맞은편의 거울을 보다가 문득 이상할만큼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올려서 뺨을 만져보고 있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생경해 보이는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가슴께까지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다가 문 득 역한 느낌 때문에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그대로 코에서 피가 한움쿰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입안에서도 비릿한 맛이 나서 욕조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입안에 든 것을 내뱉았다. 몸 밖으로 자꾸만 피가 새는건 <세포융합>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의료센터에 있을 때 의사가 설명해 주었다. 몸속에 <알>이 생기면 성질이 전혀 다른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는 데 원래의 세포와 새롭게 만들어진 세포가 몸속에서 서로 융합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또다시 만들어지는 잡종세포 때문에 눈동자의 색이 변 하거나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인데, 마치 상처라도 난것처럼 끊임없 이 피가 나오는건 <알>이 몸 속에서 나오기 위해 점액질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융합된 세포들이 뭔가 이상을 일으켰기 때문 이라고 했다. 보통은 피를 흘린다던가 하는 따위는 거의 없지만 어차피 바깥으로 나온 알도 비정상적인 <기형>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두 번째의 알이었기 때문에 기형이 된건지도 모른다. 이미 만들어진 몸속의 잡종세포와, 또다시 알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새세포가 이상을 일으켜서 두 번째 알에 문제가 생긴거였을지도 모 르니까,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한참을 욕조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다가 문득 얼굴을 들자 문이 열린채 무건이 욕실 입구에 서있는것이 보 였다. 의료센터에서 나온후 처음 보는 것이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건지 알 수 없어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이에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욕조 속의 물에 손 을 집어 넣어 보고, 난폭한 동작으로 물 속에 잠겨있던 몸을 멋대 로 안아 올린뒤 욕실 한쪽에 치워둔 두꺼운 욕의를 집어들고 있었 다. 그리고는 그것을 발가벗은 몸에 둘러주었다. 느닷없이 물속에서 잡아 올려지는 바람에 방심하고 있다가 뭔가 몸 이 떨릴만큼 괴로운 기분으로 껴안겨 있는 몸을 닥치는대로 걷어찼 는데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깨닫고보니 침대 위에 던져져 있었다. 미친 듯이 버둥거린 탓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일주일만에 나타 난 남자를 노려보고 있자, 뭔가 간신히 감정을 누르는 것 같은 얼 굴로 무건이 입을 열었다. "왜 진작에 의사를 부르지 않았지? " 목소리는 침착하지만 어조는 사납다. ".....필요없어요. " 피는 이미 멎어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린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언제부터야? " "........" "대답해 봐. " "기억 안납니다. " 정말로 생각이 안났다. 사실은 지난 며칠 동안의 일도 전혀 기억에 없다. 내 대답에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는 어쩐지 지친것처럼 가 라앉은 목소리로 아무런 억양없이 다시 말했다. "목욕물이 지나치게 뜨거워. 열탕을 만들거면 그냥 샤워실을 이용 하도록 해. " 욕조 안에 뜨거운 열탕을 만든건 집안이 견딜수없이 추웠기 때문이 다. 몇겹이나 껴입어도 안되었다. "알아 들었어? " 대답없이 잠자코 있자, 다짐이라도 받고 싶은것처럼 다시 한번 확 인시킨다. 그리고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것처럼 손을 내밀어 뺨을 만지려고 했다. "귀찮으니까 내버려 두세요. " 나도 모르게 뺨에 닿은 무건의 손을 매몰차게 밀쳤다. 탓하는 것이 아니다. 왜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냐고 화내는것도 아니다. 내 탓이 더 크다, 내가 화낼수 있을만한 입장이 전혀 못되는 것이다. 자격조차도 없다,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 정말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끔찍한 기분이 드는건 할수 없는 것이다. 사실은, 그런거다. 저 남자가 말하는 애정이라던가 하는것따위 이제 두번다시 믿지 못 하겠다. 믿지 않으면 상처 받을일도 없을테니까, 어쩌면 그걸로 좋은 건지 도 모르는 것이다. 내밀어 오는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는데도 전혀 신경쓰는 기색도 없이 무건은 침대 위로 흘러내린 욕의를 집어들어서 다시 내 몸에 입히고 있었다. 닿는 것이 싫어서 손가락으로 억지로 떼어내려고 해도 이번에는 단 단히 붙잡은채로 놔주지 않는다. 올려다보자 냉담하게 굳은 얼굴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 었다. 욕의가 벗겨지는것도 상관없이 발이 닿는곳을 힘껏 걷어차고, 세게 움켜쥔 주먹으로 미친 듯이 때렸다. 닥치는대로 주먹질을 하는대도,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이 남자는 도무지 꼼짝도 하지 않는것이다. 오히려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쥐고는 갑자기 자기쪽으로 끌 어당겨서 껴안았다. 방안은 내가 거칠게 내뱉고 있는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 았다. 뜨거운 물속에 오랫동안 집어 넣었던 피부는 이제서야 아프기 시작 하는데 턱이 떨릴만큼의 한기는 도무지 멈추지가 않는다. 나도 알고 있다. 처음 의료센터로 옮겨지던 때,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던 몸을 아 플만큼 안고 있어줬다. 평소의 냉정한 모습따위 기억도 안날만큼 새파랗게 굳은 얼굴로 입 술을 깨물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괴로운 것이다.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주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거기에 달콤하게 기대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나중에 혹독하게 내버려 지는게 어떤건지 이미 다 알아버렸으니까, 이제 두 번다시 기대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을텐데,하고 참담한 기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집으로 들어갔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건지, 저 녁에 맨션으로 찾아온 일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문을 모르겠 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고집을 부려서 예전의 맨션으로 돌아왔다. 얼마 떠나있지 않았던 집이었지만 막상 돌아오고보니 아주 오랜만 인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추워서 떨었던것도 입안에 피가 고이던것도 차츰 나아져서,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침에 무건의 몸에 알몸으로 달라붙은채 깬적이 있었는데 그뒤로 는 이상하게 춥다거나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되었다. 분명히 너무 추웠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옆에 있던 몸을 껴안고 잔 것이다. 그 날 아침에 멍하니 눈을 뜨자 무건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두껍고 단단한 팔에 감싸인채 마치 아기처럼 스스로 달라붙어서 정 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놀라서 금방 몸을 뗐지만 우습게도 그뒤로는 추위같은걸 전혀 느끼 지 않게 되었다. 사람의 체온같은 것이 그리웠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곳이 추웠 던 걸까 생각해 보지만 어쩌면 또 새벽에 무건의 몸에 달라붙어서 자게 될까봐 무서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너무 꼴사나우니까, 안되는 것이다. "참, 정원에 빨갛게 핀 꽃 말야, 이름이 뭐냐? 갑자기 저런게 왜 생 겨? 얼마전까지만해도 없던 놈이." 문득 생각난것처럼 맨션 한쪽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식당에서(그러 니까 아버지가 무건에게 선물로 준, 아치형의 커다란 창이 나있는 곳이다.) 차를 마시다가, 일우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녁무렵의 느슨한 붉은 햇빛이 투명한 천장을 통과해서 내리쬐고 있었다. 아주 희미한 햇살이긴 하지만 오랜만의 자연광이다. 색이 바랜 청바지에 연한 감귤색의 셔츠를 걸치고 있는 남자는 정 부의 제재같은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것처럼 제멋대로인 옷차림을 좋아하는 것이다. "정원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습니까? " "응. 조금전 내리기 전에 에어슬랫(air slat)에서 이곳을 내려다 보 는데 뭔가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져서, 자연물은 보고 있기만해도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 드니까. " "<아나나스>라고 들었어요. " 어쩐지 묘한 눈길로 쳐다봐서, 얼른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일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알고 있었다. 도무지 왜 이곳에 다시 돌아온건지 괴롭지 않은건지, 그런걸 말하 고 싶은 것이다. "새로 종묘한겁니다. " "너는 괜찮아? " "......... " ".....그 자식, 일주일을 코빼기도 안비치더니 지금은 미친놈처럼 연 방국을 돌아다녀. 잠시도 쉬지를 않는다구. " ".....상황은 나아진 건가요?" "그러니까... 놈들과 협상을 한 연방국은 계약이 깨져서 독립국가로 따로 떨어져 나갔다. 이제 그쪽이 어떻게 되든 중앙정부에서는 일 체 도움도 관련도 안하게 될거야. 그러니까 <수상>의 역할이 큰거 란 말야. 변변치않은 수상 때문에 그 곳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립 국이 되버렸어. 신약만 손에 쥐고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살아갈거 야. 당장이라도 돔을 깨부수고 사람들을 풀어놓을수 있어? 병에 걸 리는 인간들을 신약으로 일일이 치료해 가면서? 말도 안되지. 왜 처음에 지도자를 만들고 나라를 연방국으로 묶어놨는지 놈들은 전 혀 이해를 못하고 있단 말야. 매년마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가 는 연방국이 지금처럼 유지될수 있는건 <중앙정부>에서 유전이나 생명공학 같은걸 발전시켜서 연방국으로 정보를 보내주기 때문이 야. 그만한 예산을 스스로 감당할수 있는 나라는 없으니까, 중앙정 부가 반드시 필요하긴 하지. " "돔 밖 인간들은요? " "그러니까.. 일단 소강상태라고나 할까, 언제까지 갈런지는 모르겠 지만 그뒤로 완전히 잠잠해졌어. 이쪽에서 먼저 전쟁을 시작하려면 할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놈들도 아주 만만치않은 상대가 되버려서.. 위험한 무기까지 가지고 있고 해저에는 엄청난 크기의 돔이 발견됐 는데도 아직까지도 중앙정부에서는 아무런 조처도 없지. 모른체 정 찰대를 보내서 경계만 하고 있으니까 무건도 어쩔수가 없는거야. 사실은 지금 전쟁이라도 나면 이익도 안되는 일에 중앙정부까지 무 시하면서 소란을 피울 지도자를 도와줄 놈 따위 아무도 없단 말 야." 그럴 것이다. 확실히 돔은 안전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 것이다. 일정한 인구 수를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강제추방 시키고 있다. 빈약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있는것이나 다 름없다. <신약>이 있으면 유리돔 안으로 집어 넣어져 있는 도시를 오염된 대기에 드러내 놓을수 있게 된다. 산소부족으로 생기는 고약한 질병 따위에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인간이 돔에서 자유로워지면 부패한 바다를 조사해 깨끗했던 예전 상태로 되돌려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앙정부에서 그런 것을 탐내지 않을리 없다. 차갑게 식은 차를 식당 안에서 나온 요리사가 따스한 것으로 바꿔 주고 있었다. 전대의 지도자가 고용한 이 남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곳에 서 살았다. 나이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목소리도 전혀 알 수 없는 남자다. 집안에서 요리를 먹을때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이용하지만, 이곳은 주방장이 직접 <재료>로 요리를 하는 것이다. "홀로그램을 주머니 속에 가지고 다니다가 흘렸었거든. " 불쑥 일우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어쩐지 짖굳은 웃음을 보인다. "그런데 하필 거기에 자동 메모리가 걸려 있었던건지 정보부 놈들 다 보는데서 사귀고 있던 자식 얼굴이랑 그, 거시기가 영상으로 다 보여버렸어.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는데 그 녀석 아는 놈이 정보부 에 있는 바람에 다 들통나서, 게다가 바로 얼마전에 헤어졌던 놈이 -이 놈도 정보부에서 일하지만- 아무튼 그걸 코 앞에서 딱 본거야. 변태라는 소리는 정말로 최후의 최후까지 듣기 싫은데 왜 꼭 헤어 지는 놈마다 그 말은 빠트리지도 하는건지, " "애인을 또 바꾼 겁니까? " "한번 섹스하고 그 일로 바로 헤어졌다구. " 정말.. 이 남자라면 어느날 갑자기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는 소식이 들려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말이지, 사실은 낮에 무건이 한번 다녀가 보래서 와본거지만 생각 보다 훨씬 제대로잖아, 너? 자주 올테니까 다음엔 좀 웃는것도 보 여주라. 난 너 웃는거 무지 귀엽단 말야. 좀 웃어줘." 물끄러미 쳐다보자 일우가 한쪽 입가를 올려서 먼저 바보처럼 씨익 웃어보인다. 한참이나 내 얼굴을 빤히 건네다 봐서 간신히 입술끝을 올려 보이 자, 큰 소리로 웃고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내밀어 내 머리칼을 멋 대로 헝크러 뜨렸다. 그리고는 <당분간 외롭게 지내야 돼. 소문이 나서 아무도 날 상대 안해주고 있거든.>하고 처량맞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다. 베게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조금 세게 잡아 당기고 있다. 아플만큼 잡아 당겨져서 겨우 눈을 뜨는 순간 머리 위에서 <쿡쿡> 하는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내가 자고 있던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이다. 새하얀 옷은 제복이 아니다. 목이 길게 올라오는 옷을 입고 머리칼은 목덜미까지 닿도록 아무렇 게나 길렀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남자답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썹을 찌푸리자 문득 차가운 손으로 내 뺨을 만진다. "갈색 머리에 푸른눈이군. 이런 악성 유전자를 가지고 잘도 도시 안에서 사는구나, 당신. 그것도 일반 시민은 상상도 못할 고급 맨션 에, 화원에 수족관에 또 뭐가 있는거지? " 무례한 말투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었다. 바깥에는 수행원들이 있는데 어떻게 들어온걸까, 내가 이런 남자를 알고 있었던건가? 여러 사람을 만난뒤라면 헷갈릴수도 있겠지만 만나는 사람 같은건 언제나 정해져 있다. 전혀, 모르는 남자인 것이다. 그제서야 잠이 완전히 달아나서 벌떡 일어나 앉자, 남자는 놀란 것 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금새 입술 끝을 올리면서 싱긋 웃고 흐트러 진 내 욕의 자락을 바로 잡아주었다. "예쁜 몸이지만 중앙정부의 지도자같은 악취미는 없단 말야, 아침 부터 일부러 찾아왔는데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줘. 나류! " 계속 아직 어린애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얼굴에 드러난 표정 때문이다. 여과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놓는 당돌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체격은 상당히 컸다. 목에서 넓은 어깨 끝으로 이어져있는 골격같은것도 멋지다. 외관상으로는 도시내에서 직업을 구하는것에(15세가 되면 무조건 직업을 구해야 한다) 터럭만큼의 방해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완 벽한 몸으로 보인다. 그것은 유전자가 우수하다는 뜻으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 난 인간은 성격면에서도 결함이 거의 없는 것이다. 검은 머리카락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처럼 깊고 어두운 눈 동자를 가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한번도 떠올리지 않을수 있었을까, 거실에 서서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바 깥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녀석은 아무 렇게나 허리에 손을 걸쳐놓은채 침실에서 나오는 내 몸을 아래에서 위로 빤히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물건을 품평하는 것 같은 눈이다. 그래봤자 그 자신이 조금전 침실에서 말했듯이 열성 유전자를 가지 고 있는 몸이다. 아무리 쳐다봐도 조금도 쓸만한 구석이 없는건 내 가 더 잘 알고 있다. <만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는 일우한테서 들었지만 지금 이쪽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녀석은 어쩐지 애정같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확인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자신을 낳아준 숙주가 어떤 인물인가,하는. "세룰리안 블루라고 부르나? 의료센터에서 푸른눈을 한 남자를 본 적이 있지만, 너는 정말로 이상한 색이군. 뭐랄까.. 금방 깨질 것 같 은 유리,같아. " 한참을 빤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던 녀석이 자신이 서 있던 바로 앞 의 소파에 털썩 기대앉고는 나지막한 테이블 위로 두 다리를 아무 렇게나 걸쳐놓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신발 밑바닥에 흙이 묻어있어서 테이블 위로 까만 흙 이 조금 떨어졌다. 그러고보니 조금전 침실에서 <화원>얘기를 들은 것 같다. 어쩌면 이 녀석은 이곳으로 오기전에 정원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 다. 도시에는 흙이 있는 곳이 거의 없는데 그래서 실제로 꽃이나 나무 가 심겨져 있는 정원이라는 것도 사실은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너 모르지? 네 눈, 엄청 기분나쁜 색깔이라구. " 험상궂게 노려보는 눈길로 입술만 달싹이듯이 해서 불쑥 말을 내뱉 는다. 정말로 기분 나빠하고 있다. 위협하는듯한 목소리를 굳이 듣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이미 알수 있는 것이다. 이 녀석은 진심으로 자신을 낳아준 인간을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온거냐? " <성장기형>이라는게 이런거구나, 알을 낳은지 이제 겨우 2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녀석은 성인이 되버렸다. 유아기를 지나온건지 아니면 <알>인 상태에서 곧장 성인으로 변한 건지 알수 없었다. "갑자기 온거긴 하지만, 맨션 입구에서 갑자기 정찰대원 몇 명이 나타나서 신분을 대라길래 레일건(Rail Gun)으로 쏴버렸단 말야.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고 조사 당하는건 딱 질색이니까. " "뭐? " 정말 놀랐다. 농담하는건가 하고 말끄러미 쳐다봐도, 도무지 농담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말해놓고 녀석은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레일건,이라는건 총성도 불꽃도 없는, 전류로 총탄을 튀어나가게 하 는 총이다. 탄환은 조그마해도 위력이 크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무기였다. 그런 무기를 어떻게 손에 쥐게 되었을까, "<열성유전자>를 가진 인간이라는건 정말로 조그맣구나. 오물오물 움직이면서 자고 있는걸 한참 봤더니 뭔가 나까지 간지러워져. 너 같은 녀석들이 정부에 <알>을 낳아준단 말이지? 어떻게 그런일이 가능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이상하단 말야. " "정말 정찰대원을 쏜거냐? " "그 자리에서 두 명 다 즉사했다니까? 아무래도 탄두에 들어가있는 바이러스는 몸에 치명적이니까, "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전투 정찰대가 한꺼번에 나타나서- 정말 놀랐단 말야, 아, 나를 Ⅰ0011<노아>라고 부르더군. <노아>는 헤브라이어 로 '휴식'을 뜻한다고 들었지만, 앞에 붙는 숫자는 왕족의 숫자인건 가? "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말투라던가 표정이라던가, 태평스러울만큼 느긋해 보이는 얼굴은 어쩌면 일우를 조금 닮은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히 틀리다. 이 녀석은 이상하다. 보통의 인간과 다르다. 예를 들면, 죄의식이라던가 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어느날 갑자기 덩치만 크게 자라버린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알에서 나오고부터 2주간을 계속 의료센터 내에서 지낸 모양으로 위원회에 의해 짧은 기간내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은<노아> 는 연방국의 정세라던가 도시 내 규칙이라던가 하는걸 아주 자세히 꿰뚫고 있었다. 저녁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타났을때와 마찬가지로 갑작 스럽게 맨션을 떠난 녀석은 자신이 말한대로 이곳에 상비중이던 군 인을 두명이나 쏴 죽였다. <살인>은 도시내에서 절대 금기사항이다. 녀석은 그런 규칙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태연스럽게 사람을 죽였 다. 도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된 녀석인걸까, 수행원에게 아침에 맨션 입구에서 일어난 일을 들으면서, 나는 복 잡한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하고도 체포되지 않은건 정찰대가 노아,의 신분을 알아 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어떻게 됐든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후계자,다. 중앙정부에서 녀석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녀석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이 내내 머릿속에 떠올라서 어쩐지 몸 속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미친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아플만큼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왜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걸까 생각하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아이>는 완전한 성인이 되어서 다시 나타났다. 머리는 어린아이인채로, 몸만 커다래져서, 그것이 어쩐지 못견디게 두렵고 또 애틋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 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최근에 말수가 완전히 줄어버린 무건은 귀가 시간까지 상당히 늦어 져서 나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밤 늦게 들어왔다가 아침 일찍 나가 는 일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저녁 8시 무렵이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하거 나 차를 마시거나 했었는데 (순노부가 태어난 뒤로는 자고 있는 조 그만 녀석을 가만히 들여다 보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그런것도 없 다. 모처럼 아침에 얼굴을 보게 되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고 있다가 나가 버린다. 사실은 <정부 건물>에 있을 때 내가 마구 주먹을 휘두르거나 발로 걷어차거나 해서 화가 많이 난건지도 모른다. 감히 연방국의 지도자를 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때렸다. 아무런 감각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되풀이 하다가, 어느날 문득 눈 앞에 또렷하게 보이던 얼굴에 마음껏 화풀이를 했다. 자는 사이에 발가벗은채 목을 껴안거나 하면 어쩐지 다정한 손끝으 로 뺨을 쓰다듬거나 하지만, 놀라서 몸을 떼면 다시 손을 내밀어 오는 일은 없는 것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뭔가 괴로워 보인다던가 하는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보이는 얼굴인 것이다. "<노아>라는 녀석은 이제 어떻게 되는거죠? " 막 침실로 들어오던 남자는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을 조 금 찌푸리면서 내가 어둠 속에서 꺼낸 말에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있 었다. 열린 문틈으로 거실의 빛이 새어들어와 무건의 얼굴에 뚜렷하게 음 영을 만들었다. 불이 켜지자 냉담하게 입술을 꾹 다문 남자가 침대에 앉아있는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는게 보였다. 데일만큼 뜨거운 물을 욕조에 들이붓고 목욕한 뒤부터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있는 샤워실은 무건이 직접 없애 버렸는데 덕분에 더러 움이 직접 몸에서 씻겨져 나가는걸 봐야하는 저 남자도 최근에는 <멸균실>만으로 참고 있는 듯 하다. 방안으로 들어온 남자한테서 멸균한 뒤의 풀향이 났는데(몸의 세균 을 없앤 뒤에 잔향으로 남게끔 프로그램 되어있다) 곧바로 옷을 갈 아 입었는지 매끈한 질감의 얇은 욕의를 걸치고 있었다. "<녀석>이 어떻게 되는거냐고? 중앙정부에서 다음대 지도자 자리 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돼. 그것뿐이다. " 무건이 무감정한 얼굴로 가만히 이쪽을 내려다 보면서 대답하고 있 었다.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말 했지만 자정이 넘어서까지 노아,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다 자란 성인이었어요. " "머릿속은 유인원 이하다. 머릿속이 조금 더 자라거든 상대해 줘. 집 안에 원숭이가 날뛰는건 질색이니까. " 신랄하게 말하고는 불을 조금 약하게 낮춘뒤 더 이상 아무것도 말 하고 싶지 않은것처럼 곧장 침대 시트를 들어올린다. 오늘 아침에 노아가 저지른 짓이라던가, 찾아온 일 같은건 이미 알 고 있는 것이다. 모를 리가 없다. 녀석이 사고를 일으킨 즉시 수행원과 정찰대에 의해 정보가 보내졌 을 테니까, 그런데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얼굴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좋은걸까, 사람을 둘 씩이나 레일건으로 쏴 죽였다. 아무런 죄의식도 도의도 없는 얼굴로, 살인한 이유를 귀찮았기 때 문에-라고 설명했다. 그런 녀석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대해도 괜찮은걸까, 시간이 흐르면 다 좋아질거라고 그렇게 이해해도 좋은걸까, 멍하니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사이에, 커다란 손이 허리에 휘감겨 와서 순간 깜짝 놀랐다. 무건의 손이다. 뒤돌아 보려고 하자 내 허리에 한 손을 두른채 상의를 살짝 들어올 려 옆구리의 맨살에 키스해 온다. 드러누운채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다. 물끄러미 살갗이 빨리는걸 내려다보고 있자, 무건이 문득 눈만 치 켜 올려서 뭔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 다. 재미있다는 표정치고는 어쩐지 불유쾌해 보이긴 했지만 그런 얼굴 도 최근에는 보지 못한 것이다. 빤히 쳐다보고 있자 무건이 키스하고 있던 입술을 떼고는 반쯤 엎 드린채로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낮에 <녀석>이 찾아와서 <이곳>에서 당분간 지내고 싶다고 하더 군. 거절했지만 아마 내일 쯤 이곳으로 다시 찾아올거다. 무슨 이유 로 오겠다는건지 심중은 보이지만, 그래서 더 데리고 있을 수 없는 거다. 너는 내가 지금 녀석을 대하는 태도가 불만스러운건가? " 조금 전의 재밌어하던 표정 따윈 이제 찾아볼수 없었다. 무서울만큼 진지하게 쳐다보는 눈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걸 물어봐도, 도대체 내 의견같은 것이 뭐가 중요하다는 걸까. 잠시 쳐다보다가 작게 고개를 가로젓자 무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손대면 녀석은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내 손으로 없애버리 겠어. " 너무나 침착한 어조여서 순간 내가 들은 말이 진담인지 아니면 농 담인건지 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계속 무감정한 얼굴로 살려두지 않겠다,는 따위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잘못 들은게 아닌가 하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무건은 문득 한쪽 입술 끝을 잡아당겨 어딘지 울적한 듯이 웃어 보이고는 손가락으로 내 뺨을 살짝 만졌다. 잘못 들은게 아니다. 일우처럼 농담을 좋아하는 남자도 아니다.(누가 그런 말을 농담으로 할수 있을까) 머리가 고장난 것은 노아가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를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이 남자가 아닐까, 성장기형으로 덩치는 엄청나게 커져 버렸지만 노아는 분명히 2주전 에 알에서 나온 아직 어린 아이다. 커다랗게 커진 덩치 같은건 깨끗이 무시해 버리고 그냥 아이인채로 봐줘도 괜찮지 않을까,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한건지 의식하지 못하는건 아무도 녀석의 행동 에 관해서 <주의>를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 무건이 말한것처럼 노아가 맨션에 머물고 싶어한다면 그냥 원하는 대로 해줘도 좋을텐데, 곁에 두고 하나하나 가르쳐 준다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 입가 에 와닿아서 놀랐다. 입술을 핥던 혀가 부드럽게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뺨을 만지는 커다란 손은 따스하고 온화하다. 조금의 애정도 갖고 있지 않은 주제에 만지는 손 끝 만큼은 더없이 상냥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조금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같은건 조금쯤 너그럽게 봐줘도 좋을텐데,하고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것처럼 일주일에 한번씩 들리곤 하던 것이 일정하게 하루에 한번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무건의 말대로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찾아온 노아에게 얼마든지 집에서 지내도 좋다고 말해뒀지만 녀석은 어쩐지 불손한 낯빛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런 낡아빠진 건물에 잠시라도 있고 싶을까>하고 콧웃음 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내던진 말처럼 그 뒤로 몇 주가 지나도록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녀석이 다시 찾아온 것은 한달이 조금 더 지나서, 무건이 저녁 식 사 중이었을 때- 마치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나 식탁 앞에 풀썩 주저앉더니 <거죽만 요란한 집인줄 알았더 니 취미도 야단스럽다>고 무건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말만 골라 서 꺼내고 있었다. 한달 만에 다시 찾아온 녀석은 여전히 안하무인에 오만한 태도로 깔보는 듯이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폭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따위 한번도 본적 없었지만 무시무 시한 눈으로 납작한 흑빵을 아무렇게나 입안으로 집어넣는 노아를 쳐다보고 있던 남자는, 평소의 서늘한 얼굴따위 생각도 안날만큼 감정이 사납게 일그러져 보여서 자리를 피하고 싶어도 움직일 수 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때려눕힐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 는데도 이 녀석은 심술궂은 얼굴로 <비생산적인 취미> 어쩌고 하 면서 태평스럽게 비아냥 거리기나 하고 있는 것이다. "연방국의 지도자는 깨끗하지 못한 사생활까지도 모조리 묵인되는 군요. 국가 재산인 정찰대까지 마음대로 부릴수 있으니 말입니다. " 한입 베어문 것을 다시 제 자리로 던져 놓으면서 못먹을거라도 집 어 삼킨것처럼 노아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 정찰대원을 둘이나 없앤 주제에 잘도 떠드는구나. " 죽일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주제에 무건은 목소리만은 더없이 침착 한 것이다.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는 기계같은 얼굴이라고 욕하고 있었지만 노 기를 띄게 되자 인간적으로 보인다기 보다는 오히려 더 온기가 사 라져 보였다. "유전형질이라는 것은 저도 어쩔수 없는 것이어서 말입니다. 타고 난 형질이 그런거라면 도리가 없잖습니까? " 뭐라고 비난하든 어차피 무건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성격>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의 말에 무건은 접시위의 캐비아를 조금 덜어서 입으로 가져간 뒤 태연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존재 자체도 몰랐던 인간한테서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군. " 평온한 어조지만 조금의 용서도 없는 대화였다. 무슨 소리가 더 나올지 몰라 초조한 기분으로 옆에 앉아있는 녀석 을 쳐다보자, 뭐가 우스운건지 무건의 말에 노아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식당 안의 험악 한 분위기 따위 아무런 상관없이 혼자서 한참을 큭큭거리던 녀석이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혈육이 그대로 이어져 있는 남자한테서 알을 낳게 하는 따위, 존 재를 부정하고 싶은건 오히려 이쪽이란 말입니다. " "누구도 지도자의 생활을 입에 올릴 권한 따위 없다. 너는 죽고싶 은 거군. 네가 누구의 보호를 받든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걸 보여줄 까? " 부드러운 음성으로, 묻고 있었다. 진심인 것이다. 비난하는 말투를 쓰지 않는 대신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연스럽게 내뱉는다. 녀석한테서 조금전까지 여유롭게 무건을 비웃던 표정따위 이제 조 금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은 남자는 완전히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가서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이 되었다. "제위 기간을 기다려야 한다는게 아쉬울 뿐이지만 언젠가 그 말을 되돌려 드릴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 "내가 죽은 다음에나 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다면 분명히 반역죄로 처결해 주지." "자신감 만큼은 터무니없이 대단하십니다." 신랄하게 내뱉고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난 노아가 힐끗 내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문득 꽉 다물고 있던 입꼬리를 말고 내뱉듯 이 말했다. "저급 형질의 인간이 어떤 식으로 도시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당 신을 보면 모조리 알 수 텐데 말입니다. "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말을 내던지더니 뭔가 대꾸하기도 전에 재빨 리 식당을 나가버렸다. 저급 형질이라는건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런 권한이 없는데도 잘도 도시 안에서 살아갈수 있다. 알을 낳아주고 그 댓가로 아무런 직업 없이 도시 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 지금 당장 돔 밖으로 쫓겨나도 아무런 할말이 없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조금도 없는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신랄하게 무건을 비난한 녀석이 내 얼굴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하려 고 했는지 겨우 깨닫고 나자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들어서 가늘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누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낡고 기분나쁜 건물>이라고 용서없이 비아냥거린 주제에 매일같이 이곳으로 찾아오고 있는 노아는 붉은 아나나스가 뒤덮여있는 넓은 정원을 걷는다던가 물고기가 떠다니는 새파란 수 족관 안을 들여다 본다던가 하는걸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단순히 새로운 놀이 공간을 찾은 기분으로 이곳에 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유가 어떻게 됐든 이곳에 흥미를 보이고 있 다는 것이 기뻤다. 성장기형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 자란 어른의 몸으로 이제 겨우 한달도 안된 머리를 가지고 있다 는건 어찌됐든 조금 가엾다. 녀석이 그런 이상한 기형으로 태어나게 된건 몸속에 알이 자라고 있는 것 따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내 잘못이 크다.(성격이 비틀려 있는것도 기형으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알았더라면 알이 흘러나오기 전에 병을 고쳐보려고 노력했을텐데 지금은 이미 늦어버렸다. 노아는 맨션을 돌아다니는 자신의 행동이 모니터로 조사되고 있는 것쯤 빤히 알고 있는것처럼 느리게 걷고 있다가 가끔씩 카메라 쪽 을 빤히 응시하곤 했다. 맨션의 어느 곳이나 조그만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집안에 있는 모니터로 살펴볼 수 있었는데(2주간 집을 비운 사이에 무건이 그런 장치를 해두었다.) 녀석은 그런 카메라가 있다는걸 설명해주지 않았 는데도 정확히 카메라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하는 것이다. 모니터를 통해서 보는 얼굴은 변함없이 어딘지 비틀려 있었지만 얼 굴선 만큼은 상당히 부드러워 보였다. 눈썹이 짙고 얼굴에 비해서 조금 큰 편인 코는 높게 올라가 있다. 입술도 조금 두꺼운 편일까, 요즘은 하루종일 모니터를 켜두고 노아가 보이면 자세히 관찰하는 게 버릇처럼 되었다. 실제로 빤히 쳐다보거나 하면 골을 내면서 질색을 하니까, 어쩔수 없는 것이다. 노아는 도시내의 전형적인 우성 형질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비슷하지만 녀석은 무건을 전혀 닮지 않았다. 내 얼굴을 닮은것도 아니다. (내 얼굴 같은 것을 닮게 된다면 큰일 이다) 어쩌면 저 녀석은 전대 지도자의 얼굴을 닮은건지도 모르겠다는 생 각이 든건 요 며칠사이로, 고집스럽게 비틀려 올라가 있는 입술 모 양이라던가 어딘지 매섭게 비난하는것처럼 보이는 눈빛이라던가 하 는 부분이 조금 비슷한건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더 순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좋을텐데, 도무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만 심기를 거슬리게 해도 금방 눈썹을 치켜 올리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은 알수 있지만 녀석을 화나게 하는 원인을 잘 알수가 없으니까 당황스러울 때가 많은 것이다. 아무말없이 잠자코만 있어도 화를 내니까 상당히 까다로운 놈이다. "심술 부리는거야. 이제 겨우 한달짜리 꼬마지만 엄청나게 머리가 좋단 말야. 대신 감성이 형편 없으니까 표현이 서툴게 나오는거야. 한달짜리라 생각하고 그냥 봐줘. 좀 괴팍한 놈이지만 자세히 보면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도 있고...네가 뭘 좋아하는지까지 나한테 묻 고 다녀 그 자식, 하는 짓이 꽤 귀엽잖아? " 눈을 뜨자마자 최근에 전혀 보이지 않던 일우가 난데없이 내 얼굴 을 빤히 들여다 보면서 <요즘 가정사는 어때?>하고 묻고 있었다. 변함없이, 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매가 헤풀어질것같은 느긋한 얼굴 이다. 잠을 깨면서 어쩐지 괴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태평하게 턱을 괸 채 시트를 말고 있는 내 몸 위로 상체를 완전히 기대다시피 하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자 오전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도무지 언제부터 이 남자가 이곳에 와 있었던건지 알 수 없었다. 발가벗고 있었기 때문에 녀석이 가져다 주는 욕의를 대충 몸에 걸 치고 있자 뭔가 재미난 모양새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욕의를 건네주 고는 입가에 웃음을 띄고 서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 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전혀 진담처럼 안들립니다. " "정말이라니까? 뭐, 좋아. 한번뿐이긴 하지만 분명히 신경쓰고 있었 단 말야. 나류가 기뻐할만한 게 있느냐는둥 어쩌고 하면서, 아, 그 래. 정확하게 <나류>라고 말한건 아니지만 말야. 어쨌든 최근에 녀 석은 여길 꽤나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고...." "그만 하세요. " "무건하고 사이는 어때 보여? " "이야기꺼리가 될만한 건 전혀 없어요. 만나기만 하면 서로 노려보 는게 전부니까. " 그런걸 물어보려고 일부러 찾아온건가,하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 자 일우가 수상쩍게 눈썹을 치켜뜬다. "벌써? " "벌써라니 그게 뭡니까? " "가엾잖아, 그거? " "가서 무건한테 그대로 말해 주세요. " "집안 내력이 이상한거냐, 아니면 혈연이고 뭐고 첫눈에 반하게 할 만큼 뭔가 엄청난 녀석인거냐? 전자는 용서가 되지만 후자는 문제 가 심각하다구. "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 "시험삼아 키스해 봐도 돼? " 대답도 전에 불쑥, 입술을 겹쳐와서 정말 놀랐다. 장난처럼 입술을 부벼오거나 한적은 많았어도 진지하게 혀를 집어 넣는 키스를 해온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방심하고 앉아있는 사이에 몸에 달라붙어 있던 커다 란 덩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저만치 나가 떨어져 버렸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으으윽>하고 엄살 부리는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턱을 세게 얻어맞 은 듯 한 손으로 하관을 감싸쥐면서 천천히 일어난 녀석은, 방금전 자신의 얼굴을 세게 갈긴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한번 후려치더니 입가에 묻은 피를 기분나쁜 듯이 닦고 불쑥 말했다. "자기 아들을 질투하는 미친 놈이라고 생각했었단 말이다. 이 참에 한번 확인해 두려고 해본 거지만, 방금 그건 무슨 의미냐, 노아?" 계속.. 왼쪽 턱 주위로 새파랗게 멍이 퍼져 있었다. 멸균실 안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거울로 꼼꼼히 얼굴을 살펴보던 남 자는 계속해서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얼음을 젖은 타월에 싸서 뺨에 대주자 상처에 스쳤는지 큰소리로 엄살 피우면서 타월을 빼앗곤 바닥에 딱딱한 얼음 조각을 전부 내 버린뒤 차가워진 타월만으로 멍든 부분을 조심스럽게 누른다. 일우가 분풀이라도 하듯이 얼굴을 후려쳤던 노아는 녀석의 말에 금 방이라도 다시 덤빌 것 같던 태도를 바꿔서, 그대로 옆에 있던 무 거운 소파를 발로 걷어차 넘어뜨리고는 침실을 나가 버렸다. 느닷없이 달려들어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후려갈겼던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일우를 쳐다보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총을 꺼내들 것 처럼 보여서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매번 알 수 없는 터무니없는 짓만 하는걸까,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쩐지 아연한 기분으로 천장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내리자 일우가 거울 너머로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 다. "말이지, 저 정도로 단순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니까 얻어맞거나 하는 겁니다." "화났어? " "화났습니다. " "덩치는 뭣같은 자식을 그렇게 두둔하고 싶냐? 한 대 때려줬다고 히스테리 부리지마, 난 훨씬 더 세게 얻어 맞았다구. " "귀엽게 봐주라면서 말이 틀리잖아요." "아아, 하는 짓이 아주 귀엽긴 하지. 그거 있잖아, <저런 말려놓은 해파리같은 인간은 딱 질색>이라고 욕해놓고 내가 그 <해파리>이 야기를 꺼내면 관심없는체 하면서 눈썹을 이렇게 모으고 열심히 듣 고 있는단 말야. " "...해파리는 뭡니까? " 내 말에 갑자기 일우가 미친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맞은 얼굴이 당기는지 한 손으로 턱을 감싸쥔채 타월을 나한테 건 네주고는 거울 앞의 푹신한 소파에 쓰러지듯이 걸터앉아 좀체 웃음 이 멎지 않는것처럼 한참을 더 낄낄거리다가 겨우 눈물을 찍어내면 서 말한다. "너 방금 그거 말야, 멍하니 쳐다보는 얼굴이 해파리 같다구, 그것 도 말라빠진 해파리라니- 도대체 그 자식은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오는걸까, 응? " "그게 무슨 말입니까? " "해파리같이 생겨서 보고 있으면 기분 나쁘다고 딱 자른 주제에 매 일 죽어라 여기를 드나들고 있잖아? 말과 행동이 완전히 정반대라 구. " 눈도, 코도 윤곽이 희미하다. 입술도 색이 옅은데 눈동자까지 빛바랜 푸른색이다. 도시 안의 인간들과는 분명히 다른 생김새다. 사실은 알을 낳는 남자들은 모두 나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부 건물에서 잠시 지내고 있을때 직 접 보게된 배양 센터의 남자들은 색은 옅어도 이목구비 만큼은 뚜 렷해 보였던 것이다. 스스로도 흐물흐물한 해파리 같은 생김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직접 말로 전해듣자 기분이 묘해졌다. "말을 옮기면서 즐거워 하다니 악취미에요. " 게다가 서로 주먹까지 주고 받은 주제에 어느틈에 이 녀석은 그런 것 따위 이미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형질이잖아? 저렇게까지 감정 표현이 이상한 놈도 잘 없다구. " 실컷 웃다가 지쳤는지 소파에 아무렇게나 기대 앉은채 맞은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다. 정말로 단순한건 노아가 아니라 이 녀석이다. 알 수 없는 이상한 짓을 해대고, 그런 일따위 전혀 모른다는 듯이 능청스러운 얼굴을 한다. 진지한 데라곤 터럭 만큼도 없는 것이다. 한숨을 내쉬고는 젖은 타월을 쥔채 멸균실 한 쪽의 둥근 부스 안으 로 들어가서 샤워 버튼을 눌렀다. 그대로 잠시 서서 몸에 붙은 더러움을 없애고(집안을 관리하는 컴 퓨터가 생체인식을 통해서 멸균실을 쓰는 인간의 몸 상태를 파악한 뒤 입안이나 귓 속, 몸에 묻어있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이다.) 피 부 위의 습기가 적당히 사라질때까지 기다리고 있자 어느틈에 다가 온건지 일우가 샤워부스 안으로 손을 내밀어서 슬쩍 내 얼굴을 꼬 집고는 바보같이 씨익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아이를 키운다는건 실적에 <플러스>가 되는 정도로 밖에 의미없 는 거란 말야. 내가 왜 알을 키우지 않는건데, 놈들은 낳아준 <혈 연>에 대해 개념이 없어. 귀엽게 봐주라는 말은 취소다. 나중에 울 지 말고 제발 조심해 줘. " 귀엽게 봐주라고 떠든 주제에 이제는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넌 이상하게 <아이>에 대해서 만큼은 너무 무르다구. " 하고 미간을 찡그린채 덧붙이고 있었다. 어쨌든 노아는 뭔가 조금 비틀려 보이는 녀석이니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걱정해 주는건 고맙지만 굳이 애정을 바라는건 아니니까요. " 항상 노려보는 얼굴이니까 애정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처음부터 그런 기대는 갖고 있지도 않았다. 내 말에 일우는 문득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쩐지 일이 이상하게 꼬일 것 같지만.... " "당신이야말로 한번만 더 이상한 짓하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매몰차게 말해줘도 별 신경쓰는 기색없이, 아까보다 좀 더 멍이 새 파랗게 짙어진 얼굴로 일우는 내 말에 태평스럽게 웃어 보였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일우의 턱을 후려친 것일까, 평소의 여유롭게 깔보는 듯한 표정따위 조금도 찾아볼수 없는 얼굴 로 사납게 덤비고 있었다. 일우와 밖에서 가끔씩 만나고 있는 모양이니까 집에서 마주치기 전 에 싸움이라도 한건가, 생각했지만 자세히는 둘 다 말해주지 않으 니까 알 수 없었다. 이틀 뒤에 노아는 광대뼈 부근에 일우처럼 푸르고 붉은 멍자국을 달고 맨션에 다시 나타났다. 곤란한 얼굴로 엷게 피가 스며있는 곳을 쳐다보자 녀석은 귀찮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리고는, 곧장 거실의 테이블 앞에 아무렇게나 걸 터 앉고 있었다. "치료는 안했어? " "이까짓 거 내버려 두면 저절로 나아. " 아무래도 좋다는 투로 불쑥 말을 내뱉는다. 이틀만에 나타난 녀석은 새파란 멍자국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안 색이 지쳐보였다. "그러니까... 의사를 부르면 중앙정부에서 귀찮게 군단 말이야. 지난 번에 머리가 아파서 의사한테 약을 가져오게 했을 때는 위원회에서 나온 놈들이 새로 생체검사까지 받게 했다구." "<생체검사>라는거 자주 하는거냐? " 노아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걸터앉아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녀석이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가끔. 처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귀찮게 굴어서 짜증 났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괜찮아. 의료센터는 쳐다보기도 싫으니까 오라고 해도 무시해 버리거든. " 질린다는 듯이 거칠게 내뱉고는 앉아있던 자세가 불편했던건지 소 파 등에 기댄채 한쪽 다리를 테이블 위로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있 었다. 생체검사라니, 보통의 인간은 그런것따위 하지 않는 것이다. <성장기형>에 대해서 의료센터에서 뭔가 연구라도 하고 있는것일 까, "말이지..... " 갑자기 뭔가 중요한 얘기를 꺼낼것처럼 이쪽을 빤히 건네다봐서, 무슨 일인가 하고 잠자코 있자 녀석이 문득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 다. "그 자식이랑은 어떤 관계야? "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한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문득 엄하게 표 정을 고친 녀석이 비난하듯이 말했다. "그저께 말야. 당신. " "그저께? " "그래, 사촌이라는 놈이랑 그딴 짓 해도 되는거냐구? " ".....장난친거야. 진지한 사람이 못 되니까. " 그제야 무슨 말인지 깨닫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녀석이 나직 하게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진지하지 못한건 당신이라구. 당신은 사고력이라는게 전혀 없잖 아? 누가 친형이랑 같은 침대를 쓰냐구, 친형에 사촌에 정말이지 구역질 난단 말야. " 또 이렇다. 질색을 하면서, 집요하게 비난한다. "게다가 알까지 낳아줬잖아! 순노부라고 했나? 넌 그 새끼가 어떻 게 죽었는지 모르지? 지도자라는 자식은 절대 말 안해줬을걸? 자기 치부를 일부러 드러내는 놈이 있을까, 일우는 둘째치고, 그 자식은 완전히 돌았다구. 너한테 손끝하나 대면 날 죽인다고 했어, 빌어먹 을. " 꼼짝앉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문득, 주위가 세게 뒤흔들린 기분 이 들었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집어 삼켜진 기분. 안된다, 순노부에 대한건 안되는 것이다. 기억속에 깨끗이 밀어넣고 모른체, 생각 안나는 체, 얼굴도 목소리 도 전부 잊어 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유전자가 형편 없으니까 하는 수 없지. " 얼굴을 찌푸리면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녀석을 향해서, 간 신히 머릿속으로 떠올린 대답을 한다. "어쨌든 기분 나쁘니까 두 번다시 당신 사촌이랑 이상한 짓 하지 마, 껴안고 뒹구는건 그 놈 하나로 끝내라구.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역겨우니까. ....그 말 해주려고 일부러 들렀단 말야." 이상한 생물체라도 보는 것 같은 차가운 눈으로 용서없이 내뱉고, 이제 할 말은 다했다는 듯이 재빨리 일어나고 있었다. 친형의 알을 낳았다. 녀석이 기분 나빠하는게 당연하다. 자신도 그렇게 해서 태어났으니까, 괴로운 것이다. 올곧은 일이 아니니까 비난받는 것이 맞다. 조금전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건 방금 출입구 밖으로 사라진 녀석 때문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떠올리지 않으면 될 것이다, 생각해 내지 않으면 된다. >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반복하면서 고개를 세게 젓는 다. 어쩐지 뒤죽박죽으로 섞인 머릿속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허리를 꼬부린채 엎드리고 있었다. 생각해 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그런 것만 생각한다. 저 녀석이 두렵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유도 모른체 문득 두렵고 떨리는 기분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 다. 계속.. "노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잠시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불쑥 말을 내뱉자 끝이 조금 갈라져 보 이는 턱을 만지면서 한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기계적 인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즘 <후계자>께서 드나드는 곳은 이 곳이 아닐텐데? ] 화면에 비치고 있는 남자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실제로 만났던 적 이 있었다. 위원회의 인간으로, 오래전에 전대의 지도자를 만나러 직접 맨션으 로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전대의 지도자가 내주지 않았던 내 유전자 정보를 직접 눈으 로 확인한 남자는 얇은 입술을 비틀면서 내 모습을 <끔찍하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후계자를 여기서 찾다니 이상하군.] 화면 너머의 남자는 고개를 흔들면서 느긋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노아는 그 뒤로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정부건물로 메시지를 넣어봐도 집은 이미 며칠전부터 비어있다는 대답뿐으로, 아무도 녀석의 행선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목이 졸리는 기분으로 하는 수 없이 중앙정부에 메시지를 넣었던 것이다. "노아에 대해서는 위원회에서 더 자세히 알고 계실테니까 말입니 다. 이곳에 자주 들리고 있다는 것까지 알면서 행선지에 대해서는 왜 모른다는 겁니까? " 있는 곳을 알아내서 뭔가 나쁘게 하려는 의도같은건 없다. 대단한 일도 아닐텐데 왜 말해주지 않는걸까, 노려보고 있자 살빛이 조금 어두운 남자는 어딘지 꺼림직한 얼굴로 홀쪽하게 마른 입가를 잡아당겨서 웃어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게되면 <숙주>가 찾 고 있더라고 내가 전해주겠다. ] 가느다란 눈으로 웃고있는 얼굴을 한껏 노려봐 주면서 잠자코 통신 을 끝냈다. 이 남자는 예전에는 나를 <끔찍한 실패물>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숙주>라고 아무렇게나 부르고 있었다. 도시내에서 알을 낳은 인간은 가장 저급한 대우를 받게 된다. (어쨌든 돔 밖으로 쫓겨나는 일은 없으니까, 부족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들은 도시 안에서 알을 낳는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푸른 눈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이미 실격,이라는 의미다. <살인금지>라는 법이 없다면 푸른눈을 가진 인간들은 유일하게 모 두가 없애고 싶어하는 대상이 될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알을 가지고 싶어하는 인간들 조차도, 그 알을 낳아주는 숙 주에 대해서는 <쓰레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위원회의 남자는 나를 알을 기생시킨 생물체라고 빈정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숙주라는, 위원회에 내 얼굴을 드러내봤자 비웃음거리 밖에 안된다. 또다시 내 거주지에 대해 문제만 불거질지도 모르는데. 직업도 없고 나는 배양센터의 인간이 아니므로 도시내에 거주하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분명히 법을 어기는 짓이다. 아무런 직업없이 도시내에 안주해도 좋을 15세라는 나이는 벌써 오 래전에 넘겼고 중앙정부에서는 끊임없이 내 존재에 대해서 불만을 말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위원회의 인간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낸 것은 노아를 통해 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벌써 일주일 이상이나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는 녀석을 당장이라도 불러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노부에 대해서 녀석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모조리 다 듣고 싶 었다. 집안의 중앙 컴퓨터는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모조리 금기시 되 어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건은 순노부가 <돔 바깥에서 죽었다>고만 말했다. 그러니까 짐작해 볼 뿐인 것이다. 죽었다면, 아마 병에 걸려서 죽지 않았을까 하는. 순노부의 죽음따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존재 했다는것조차 잊고 싶어서 머릿속에서 조그만 녀석을 지웠다. 하지만 틀렸다. 머릿속이 괴로워서 모른체 했던 녀석이 어디에서, 어떻게 죽어버렸 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순노부가 그리웠기 때문에 억지를 부리면서 이 곳으로 다시 들어왔 다. 무건은 어차피 손톱 만큼의 신뢰도,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남자 다. 다정하게 쳐다봐 주지만 그 뿐이다. 쓸모 없어진 인간은 조금의 미련없이 그대로 잘라내 버린다. 순노부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아무렇게나 내버려질 것이다. 무건이 언제 마음을 바꿔서 의원회에서 충고하는대로 나를 돔 밖으 로 나가게 할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잠자코 있지만 내일은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내일이 아니면 모레, 그렇다면, 그런 때가 오기전에 순노부가 있던 곳에서 지내고 싶다 고 생각했다. 사실은 괴롭다. 수족관을 보는 것도 식당에 있는 것도, 침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 마저도 숨쉬기조차 힘들만큼 괴롭다. 조금이라도 순노부가 있던 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은 녀석에 대해서는 손톱 만큼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괴로워서 기억 안나는 척 모른체 하고 지냈다.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일까, 노아가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나는 분명히 녀석한테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두려워서 질식할 것 같아도, 말이다. 한 밤에 눈을 뜬건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 때문이었다. 가슴이 눌리는 느낌에 몸을 뒤척이자 곧장 뺨을 붙잡혀서 집요하게 키스 받는다. 간신히 머리 맡으로 손을 뻗어서 어두운 침실에 희미하게 빛이 들 어오게 한 다음 상체를 일으키자 눈 앞으로 무건이 물끄러미 내 얼 굴을 내려다보고 있는것이 보였다. 지금 막 들어온 건가 했지만 제복이 아니라 연한 갈색의 욕의 차림 이다. 샤워 후에 말리지도 않고 곧장 나온 것처럼 머리칼이 조금 젖어 보 였다. "노아를 왜 찾고 있지? "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갑자기 앞 뒤 가 잘린 질문을 한다. 의원회의 인간이 하릴없이 내가 전한 말을 지도자에게 보고 했을리 가 없을텐데 어떻게 알고 있는건가 하고 쳐다보자 서늘한 얼굴을 해서는 내 머릿속을 모조리 들여다보고 있는것처럼 덧붙이고 있었 다. "중앙정부로 통하는 연락은 전부 통제실을 거치게 되어있다. " 중앙 통제실은 지도자가 있는 곳이다. 내가 낮에 위원회의 인간과 했던 이야기 같은건 모조리 통제실로 연결되어서 기록되고 있었던 모양으로, 그렇다면 내가 노아를 찾았 던 일을 무건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노아가 일주일째 아무런 연락이 없어요. " 그럼 이제껏 일우와 이야기 했던 내용들도 모조리 보고 있었던걸 까, 생각하면서 어딘지 잠이 덜깬 멍한 머리로 대답했다. "녀석은 지금 돔 밖으로 나가 있어. 일이 끝나면 일부러 부르지 않 아도 이 곳으로 찾아올거다. " 전혀 뜻밖의 말을 해와서 놀랐다. "일이라니, 무슨 일을 한다는 겁니까? " "글쎄, 무슨 일일까. " 진심으로 묻고 있는것처럼 빤히 쳐다봐서, 가만히 생각해 보고 있 는 사이에 문득 무건이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천천히 쓰다듬어왔 다. "노아는 네가 생각하는 <어린애>가 아니야. 철저하게 정부쪽에서 교육받고 움직이고 있는 놈이다. 위원회에서 부려먹기 딱 좋을만큼 무모하고 교활한 녀석이지. " <무모하고 교활하다>니, 무모할지는 몰라도 교활하다는 말은 이상하다. 그래봤자, 알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는 놈인 것이다. "노아가 돔 밖으로 나간 사이에 <신약>이 중앙정부로 들어왔다."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남자가, 문득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해왔다. 난데없이 신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뺨을 만지던 손을 내리고는 냉담한 어조로, 무건이 다시 입을 열었 다. "한두번은 이상하지 않더라도 너무 자주 어울려. 돔 바깥의 인간들 은 <성장기형>인 노아에게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형질이 비슷 한 놈들끼리 서로 원하는 것이 같을 때는 협조하게 되는게 쉽지. 노아가 돔 밖에서 <중앙 정부>로 신약을 보낸거다. 연방국의 수상 하나는 신약을 얻으면서 해저돔을 내줬지만, 이 녀석은 댓가로 돔 밖의 인간들에게 뭘 주기로 한걸까, 응? 꽤나 조급했던 거야, 이렇 게 빨리 일을 저지른걸 보면. " "그게 무슨 뜻입니까, 노아가 돔 밖의 인간들과 어울리고 있었다는 겁니까? " 매일같이 이 곳을 드나들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도시 밖으로 빠 져 나가고 있었다는 말일까, 게다가 돔 바깥의 인간들과 어울리다니, 그게 정말 가능한 건가, "그래서 교활하다는 거다. 돔 바깥에 있는 유전자 기형의 인간들을 이용할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자신이 <성장기형>이기 때문에 어울 리기가 쉬웠을테지, 결국 놈들이 가지고있는 신약까지 중앙 정부에 보내게 했을 정도라면 말이야. " 그러니까, 이 남자는 노아가 돔 바깥의 인간들과 거래를 해서 중앙 정부에 신약을 보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노아가 그런 일을 정말 했다는걸까, "그래서 돔 밖의 인간들에게 신약에 대한 댓가로 뭘 내준다는 겁니 까.....? " "지금쯤 해저돔에서 노아가 거래중일테지. 녀석이 원하는건 한가지 뿐이다. 그걸 가지려면 <지도자>가 사라져야 하고, 그건 돔 밖의 인간들이 바라는 것과도 일치한다. 서로 원하는 것을 가지고 공통 된 적을 없애는 거지. " 이 남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만 한다. 그런데도 어쩐지 심장이 뛰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노아가 바라는게 뭐라는 걸까, 왜 지도자가 사라져야 한다는 걸까, "나류, 나는 노아가 원하는 것을 넘겨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 전 에 내 손으로 놈을 죽여줄 테니까. " 이번에야 말로 진심이다. 정말로 노아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뭔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노아,라는 <성장 기형>의 녀석도, 순노부가 사라진것도 모 두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고약한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걸까, 이 남자는 정말 다시 한번 자신의 아들을 죽일 생각인건가? 제정신인건가?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에 무건은 자신이 내뱉은 말따위 아무것도 아 니었던 것처럼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건네다 보고는 문득 내 코 끝에 키스하고 뺨에, 입술에 입맞춰오고 있었다. 어지러워서, 천장이 제멋대로 내려앉는 것만 같다. 깨닫고 나자 등 뒤로 서늘한 시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상의가 완전히 머리 위로 걷어 올려지고, 곧장 하의가 벗겨진다. 가느다란 허벅지가 아플만큼 크게 벌려지고 반쯤 발기한 성기가 발 가벗겨진 다리 사이로 파고 들고 있었다. 목덜미를 깨물린뒤에 가슴을 힘껏 빨린다. 눈을 감고, 끔찍한 상상을 한다. 몸에 구멍이 뚫린채 피투성이가 된 노아라던가, 바이러스와 세균이 몸에 번져서, 울고 있는 조그만 순노부 라던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몸속으로 미끈하게 성기가 파고 들어왔다. 도무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끔찍한 남자다. 나를 두고 '끔찍한 실패물,이라고 했던 말은 옳았던 건지도 모르는 것이다. 천천히 몸이 뒤흔들리면서, 이런 쓸모없는 몸이라면 그냥 태어나지 않았어도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그러면 순노부도 괴롭게 죽지 않았을테고 노아도 아버지에게 살해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괴로울만큼 몇 번이나 몸 속을 휘젖던 것이 간신히 빠져나가자 뱃 속이 아파져서 움직일수가 없었다. 몸을 씻으려고 간신히 일어나려다가 곧장 커다란 손에 허리를 잡아 당겨져서, 껴안겼다. 이상할만큼 집요하게 붙잡고 고간을 핥거나 아프게 잡아당기고 있 었다. 다시 허리 부근에 단단한 것이 와닿아서 작게 <괴롭다>고 말해봤 지만 남자는 모른체 다리를 크게 벌리게 하고 붉게 색이 변한채 조 그맣게 말라붙어 있는 내 성기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계속... 무슨 생각으로 혼자 돔 밖을 나가서 연방국가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인간들과 어울릴 생각을 했을까, 돔 밖의 인간들은 도시를 만들고 돔을 만들어낸 중앙정부와 지도자 를 증오하고 있다. 이건 일우가 예전부터 해준 말이었다. 돔 밖은 위험하다.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살해 당할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거기에 조금의 죄의식도 가지지 않는다. 자신들이 당한 피해가 훨씬 끔찍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신약>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도시 바깥의 인간들은 온 몸에 바이 러스와 질병을 가지고 살았다. 누군가로부터 옮은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더러운 공기 때문에 자연 적으로 몸속에 생긴 병이다. 그런 몸으로 역시 기형의 아이들을 낳는다. 손 발이 없거나 얼굴이 함몰되어서 눈이 보이지 않거나 뇌가 허물 어진 기묘한 체형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다. 200년이나 되는 생명따위, 질병으로 엉망이 된 몸으로는 아무런 의 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놈들이 가지고 있던 신약이 중앙정부로 넘어가게 되 었을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정말 노아가 그 일을 혼자서 했다 는 건가? 자신의 <신체기형>인 것을 이용해서 돔 밖의 인간들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다는 건가?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돔 밖을 출입하고 있었다는걸까? 무건이 했던 말은 몸조리 의문 투성이의 알 수 없는 내용들 뿐이 다. 제대로 이해할만한 것은 신약이 <중앙정부>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런 조건없이 놈들이 소중한 신약을 내줬을 리가 없을테니까. "아? 무건이 그런 말을 해? 노아가 중앙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싶어한다고? 이건, 큰일이군. " 기껏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는데 자신이 내뱉는 말의 의미에 반해 진지함 같은건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작은 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무건이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내 말에 일우는 큰소리로 웃어 제끼고 있었다. 하얀 모피로 감싸인 푹신한 소파에 기대 앉아서 배가 아프게 웃다 가 뜨거운 차를 조금 흘리기까지 했다. "확실히 정신이 올곧게 박힌 놈은 아니잖아. 새삼스럽게 무슨. " 희미하게 멍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콧웃음 을 친다. "그냥 내버려 둬. 부자 사이가 안좋은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 이니까-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구. 응큼한 놈이란 말야, 우습게 보다가 코가 깨물린건 무건이야, 넌 노아가 마냥 귀엽게 보이는 모 양이지만 무건은 그 자식 면상을 으깨놓고 싶은 거라구. 나라도 반 쯤 죽여놨을거야. 미친 놈이 이젠 별 지랄을 다한다구 욕했었지만, 내가 확인해 봤잖아, 아니야. 뇌수가 맛이 간건 어차피 둘 다 피장 파장이란 말야- 내버려 둬, " 아침부터 싱글거리는 얼굴로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일우는 대뜸 노 아가 맨션에 돌아왔는지,부터 묻고 있었다. 노아의 행방에 대해서는 정보부에 있는 일우도 전혀 모르고 있었 다. 갑자기 이 남자가 노아를 찾는것이 이상해서 <신약> 때문일까 생 각하고 있었더니 엉뚱하게도 갑자기 차를 마시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리고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요란한 오렌지 색 티셔츠에 청바 지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며 맨션에 나타난 것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가, 생각하는 사이에 느긋하게 침실의 소파 에 기대 앉은 남자는 갑자기 무건의 이야기를 꺼내왔다. <어제밤에 무건이 어때 보였느냐>고 물어와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고 솔찍히 대답하자 갑자기 낯빛을 일 그러 뜨리고는 제멋대로 실컷 웃어보였다. <노아가 지도자 자리를 가지고 싶어한다고- 무건이 믿고 있는것 같다>고 걱정스럽게 말해봐도 그다지 심각하게 듣고 있는 것 같지 도 않았다. "노아가 정말 그동안 돔 밖 출입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 침대에 걸터 앉은채 어딘지 멍한 머릿속으로 묻자 일우는 골치 아 프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면서 대답했다. "나도 몰랐어. 정찰부에서 입을 닫고 있는 이상 누가 돔 밖을 출입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가 없으니까. " "왜 그런 것이 비밀이 되는 건가요? " "그러니까 그게 쬐금 이상하긴 해. 지금까지 벌써 몇 번이나 드나들 고 있었는데도 한번도 그런 보고가 들어온 일이 없었거든. 미리 알 았다고 해도 심심해서 몸부림치다 돔 밖으로 뛰쳐 나갔다고 생각했 을테지만... 어쨌든 어제 중앙정부로 <신약>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 고 나야말로 뒷통수를 한 대 후려맞은 것 같았단 말야. 녀석이 돔 밖을 드나들고 있었다는 것도,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정보 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 "그건....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 노아는 무슨 생각으로 신약을 거래하는 위험한 일을 몰래 해왔던 걸까, 위원회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녀석은 정말 뭐든지 다 하는걸까? "위험한 일이지. 중앙정부에서 노아의 행방 같은걸 비밀로 할 이유 가 없으니까 노아 스스로 돔 밖 출입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움직였 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서, 무건은 녀석이 <최고 지도자 자리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돔 밖을 고양이처럼 몰래 돌아 다녔 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요즘 안그래도 상태가 안좋더라 니 새끼가 완전히 맛이 갔구만. " 산뜻한 얼굴로 결론을 내고 마시던 찻잔을 소파위에 올려 놓더니 일우는 불쑥 내가 앉아있던 침대 위로 올라와 내 다리에다 아무렇 게나 머리를 올려놓고 드러눕고 있었다. 거칠고 다혈질인 인간들만 사귀는 주제에 이 남자는 뜻밖에 씩씩한 덩치를 해가지곤 응석 부리는걸 좋아하는 것이다. "소중한 휴일에 할 일 없이 빌붙으러 오는 처량한 신세니까 나도 노아처럼 귀엽게 봐줘라. 덩치크고 사나운 놈이 너는 상당히 귀여 운 모양인데 덩치라면 나도 충분히 크고 성질도 만만찮으니까 나도 귀엽게 봐 줘. " 내가 노아와 같이 있는따위 한번도 제대로 본 적 없으면서 귀엽게 봐주라는 둥 말한다.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 짓자 아무렇게나 드러누운채 잘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문득 <무건이 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네가 노아 를 어떻게 대하는지 대충 계산이 나온단 말이야>하는 잘 이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휴일이었어요? " "응. 지난번에 <나체 홀로그램> 때문에 감점이 생겨서-근무 태만 에다 공공장소에 음란물 유입죄까지 얹어져서- 제대로 얻은 휴일이 아니면 이제 일년 휴가를 완전히 반납한 뒤에야 근무지 무단 이탈 이 가능하단 말야. " 그건 애인의 나체 영상을 멋대로 찍어서 들고 다닌 이 남자의 이상 한 취미 때문이었지만 덕분에 사귀던 남자한테 <변태>라는 말까지 듣고(이런 말을 듣는 것도 당연하다. 일우가 실수로 떨어뜨린 기계 가 결국 이상 작동을 하는 바람에 공공장소에서 사귀던 남자의 나 체가 보여 버렸으니까) 차였던 것이다. 불만스럽게 투덜거린뒤 잠시 뭔가 생각하는것처럼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남자가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이지,실은 어제 신약 얘기를 듣고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서 무 건이 있는 통제실로 찾아갔었단 말야, 그런데 이 자식도 몰랐었던 거야. 노아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신약까지는 전혀 예상을 못했었나 봐. 새끼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건 나도 알고 있다구. 무슨 상상을 하는지도 알고 있고...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 내가 무건을 붙잡아놓고 <네 아들이 머리가 살짝 돌아있긴 하지만 네 자리를 노리고 신약을 거래한건 아닐거다>고 말해둘 테니까 노아에 대해서는 걱정 안해도 돼. " 가늘게 눈을 뜨고 윙크를 해보이면서 태평스럽게 말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조리 다 아는 것처럼 말해와서 이 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의심하고 싶어하는걸까.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일우는 응석 부리듯이 기대고 있던 내 허리 를 팔로 감싸 안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콧웃음 치고 있었다. "의심 받을만한 짓을 했다구. 돌아오면 단단히 야단쳐줘. 뭐래도 몰 래 돔 밖 인간들을 만나고 다닌 행동은 충분히 무모했으니까 말야. 무건은 나름대로 최대한 봐주고 있는거니까 뭐라고 하지마. 일단 집안에 녀석을 들이고 있잖아. 그거만으로도 상당히 참고 있는거라 니까. " 왜 참고 봐줘야 하는건지 모르겠다. 순노부한테는 꽤나 다정하게 굴었던 주제에 노아에게는 손톱 끝 만 큼의 애정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터무니없는 의심까지 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다. 부친이라면 좀 더 너그럽게 돌봐줘도 좋을텐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기분으로 일우에게 <순노부가 어떻게 죽었는 지 알고 싶다>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부건물에 잠시 머무르고 있을 때, 그렇게 물었던 적이 딱 한번 있었다. 모니터 너머에서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는 곤란하다 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짤막하게, <그런거라면 나는 해줄 말이 아무것도 없어.> 라고 대답했다. 입을 꾹 닫은 남자한테서 들을 수 있었던 건 <미안하다>는 말 뿐 이었다. 컴퓨터에게 물어봐도 최근에 일어난 일은 죄다 <탐색금지>가 되어 서 아이가 유괴되어서 살해된 일에 대해서는 데이터가 전혀 남아있 지 않았다. 그러자 사실은 순노부가 죽었다는 것 따위 전부 다 거짓말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따위 아무도 언급해 주지 않는다. 조그만 사체는 어디에 있는걸까, 산소부족으로 몸에 이상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뭔가 다른 이 유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몸에 병이 생긴게 아니라 그 전에 <살해>당한걸지도 모른다. 돔 밖의 인간들이 감금 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해저돔에 공기가 충분히 있으니까 아직 살아있을지 모른다. 전부 다 상상일 뿐인 것이다. 모조리 내가 멋대로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상상이다. 하루종일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렸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잠에서 깨어나면 또다시 악몽의 연속이고 그것 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자 도무지 견딜 수 없어졌다. 그래서, 곁에 달라붙어있던 아이의 얼굴이나 말투, 행동같은 것을 모조리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 어느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이 바로 잠들기 전의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괴로운 기억 같은건 두 번다시 떠올리지 않아도 좋다고, 느리고 둔 해진 머리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치 아래가 간지럽다. 차갑고 축축한 뭔가가 꿈틀대며 몸 위를 기어다니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작게 신음 소리를 낸다. 습기를 띈 말랑거리는 것은 차가운 점을 남기면서 턱 부근에서 할 짝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점액질의 부드러운 소리를 내던 그것이 젖가슴을 물고 다음 순간, 세게 깨물었다. 쥐어 뜯기는듯한 고통에 눈을 뜨자 어딘지 열에 들뜬것처럼 눈가가 붉게 젖어 보이는 녀석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기름한 얼굴선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분명히 같은 녀석인데, 왜 생김새가 조금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걸까, 사실은 이 녀석은 <성장>을 계속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아니면 너무 코 끝으로 바짝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생김새가 조금 달라보이는 건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뭔가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목덜미 부근이 환히 드러난 느낌이 든다. 게다가 드러난 가슴 위로 차갑고 딱딱한 감촉의 손이 파고 들어와 있었다. 조심스럽게 피부 위를 덧그리던 손 끝이 세게 깨물렸던 가슴의 돌 기에 닿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이에, 노아 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체에다 대고 발정하는 미친놈은 아니니까 그만 일어나 봐, '가족 놀음,은 집어치우고 좀 더 교활하게 머리를 써 보라구. 널 갖고 싶 어졌어. 그 녀석은 내가 없애줄게, 내가 너를 <받아줄>테니까. " 계속.. 빈정대듯이 가벼운 말투를 쓰는 주제에 눈빛은 진지하다. 갖고 싶어졌다, 라던가 받아주겠다,라던가- 발정이라던가 하는 말의 의미를 멍하니 떠올려보고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찾고 싶어서 위원회의 인간한테 연락까지 했던 녀석인데 막상 얼굴 을 마주대하게 되자 어쩐지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누굴 없애주겠다는거야..? " 얼빠진 음성으로 묻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녀석에게 목이 눌린 어중간한 상태로 제지 당했 다. 일부러 목을 누르고 있지 않아도 커다란 덩치에 몸이 깔려 있으니 까 꼼짝할 수가 없다. 괴롭히려고 하는게 아니다. 목을 감싸고 있는 손은 크고 두껍고 단단했지만 억지로 힘으로 누 르고 있지는 않으니까, 숨이 막히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잡아 떼려고 손가락을 얽어보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손에 힘을 주어서 억지로 잡아떼내려고 하자 눈앞에 있던 녀석이 갑자기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내 말 못알아 들었어? 무건의 숨통을 내가 끊어 주겠단 말이야." 눈가를 기묘하게 일그러 뜨린채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말한다. "너 말이지, 움켜쥐면 살이 짓물려 버릴 것 같아. 이대로 잡아 뜯으 면 금방 찢겨버리겠지, 응? 아무런 무기도 없이 한 손으로 간단히 망가뜨릴 수도 있어. 살아서 숨쉬는 것 밖엔 아무것도 못하는 하찮 은 인간, 최악의 유전자와 비등하게 의지라고는 요만큼도 없지.<선 택>을 하라는게 아니야, 그런 사치스런 놀이 같은거 넌 하는게 아 니라구. " 확실히 머리가 조금 이상한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적은 있지만 지금만큼 불길한 정도는 아니었다. 돔 밖에서 뭔가 기분나쁜 일이라도 당하고 온걸까, 신약거래에 이상이 생겼다던가-(어차피 중앙정부로 들어간 신약은 <샘플>에 지나지 않으니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여기 말이지, 통제실로 연결되어서 전부 보여지고 있다구, 순노부가 사라졌을 때부터 계속-. 수행원 같은건 이제 신임할 수 없는거야, 그 자식은. 감시회로로 전부 연결되어 있다구. " 목을 누르고 있던 손은 금방 치워졌지만 어쩐지 기묘한 느낌으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노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부, 보여지고 있다- 순노부가 사라졌던 무렵부터, 통제실이라면 무건이 있는 곳이다. 맨션 곳곳에 세워둔 카메라처럼 침실이나 거실에도 그런 카메라가 있다는 걸까,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적 없었기 때문에 놀랐다. "그런 얼굴 하지마. 위원회 놈이 지껄이는걸 들은거니까 정확하단 말야. 어쨌든 그 자식도 참는거에 한계란 것이 있으니까 아마 지금 쯤은 달려와서 죽일것처럼 굴어도 전혀 이상할게 없다구. 그런데 아직 안나타나고 있어, 이제 나는 더 이상 봐주고 싶은 생각도 이 대로 질질 끌 생각도 없으니까 왜 아직까지 그 자식이 보이지 않는 건지 네가 한번 잘 생각해 봐. " 이 녀석은 무슨 소릴 하고 싶은걸까, 어딘지 즐거워 하는것처럼 내뱉는 말투도, 말의 내용도 전부 이상 하다.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서 위원회가 의심을 품게 되면 골치 아파 져. 돔 밖의 인간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결국 놈들 손에 신 약이 들어가 버렸고 해저에는 중앙정부가 모르는 돔까지 발견됐어- 덕분에 연방국 하나를 잃게 된 것도 소중한 후계자를 놈들한테 내 준것도 모조리 지도자의 실수라구. 거기에 대해서 무건은 책임을 져야 할거야. " <받아주겠다>고 말한다. 교활하게 머리를 써보라고, 무건이 지도자의 자질을 의심받고 있다는 말을 꺼낸다.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원회 인간들이 무건한테 책임을 묻고 있다는 말을 이 녀석은 하 고 있는 것이다. 책임을 묻는다-니 중앙정부의 지도자에게 위원회가 책임을 묻는다, 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받아주겠다, 갖고 싶어졌다, 무건의 숨통을 끊어주겠다,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는다. 노아가 끄집어낸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확실히, 위원회가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은 크다. 하지만 지도자를 상대로 책임이란것을 물을수 있는 권리까지 위원 회가 가지고 있다는걸까, 달라붙듯이 해서 몸을 누르고 있던 녀석을 밀치고 멸균실로 걸어 들어갔다. 이건 이상하다, 이상한 것이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머리를 감싸안은채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는다. 확실히, 돔 밖의 인간들이 신약을 만들어 낸 일이라던가 해저에 허 가받지 않은 돔이 세워진 거라던가 하는 따위 중앙정부와 지도자의 부주의 탓이 크다. 도시 바깥의 인간들을 안이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돔이 유지되고 있던 수백년 동안 도시 바깥은 결코 위협적 인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시내에서 주거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인간들을 수용하는 곳> 외 에 어떤 의미도 없던 곳이었다. 온 몸에 세균 덩어리를 매달고 있는 인간들과 유전자 결함의 인간 들이 모자라는 산소로 겨우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그런 극악한 곳 에서 중앙정부도 만들어내지 못한 신약이 만들어 질거라고는 지도 자라고 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책임운운,하는 말이 나와야 하는지 알수 없었다. 게다가 위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도자에게 <자질>을 문제 삼 을 권한이 없다. 저 녀석은 방금 돔 밖에서 돌아왔으면서, 어째서 도시 안에서 일어 난 일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것처럼 나보다 더 세세히 꿰뚫고 있는 것일까, 중앙정부와 관련된 일 같은건 모조리 알고 있는것처럼 말하는 것이 다. 거기다가, 무건의 숨통을 끊어놓겠다고 말한다. 무건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말한것처럼, 똑같은 말을 서로 되풀이 한다. "그 자식, 지금쯤 재판부로 강제소환 되었을거란 말야. 잘난척 하는 네 사촌도 이번 만큼은 어쩔수 없을거다. 지도자의 불성실은 죄가 무겁다구. " 기대 앉은 문 너머로 녀석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려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움켜 쥐었다. "말이지, 네가 알고 싶어하는걸 내가 알려줄까? 순노부에 대해서 궁 금한거잖아, 응? 컴퓨터로 계속 그 녀석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었 지? 그래서, 찾았어? " 문 밖에 서있는 녀석은 내가 컴퓨터를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몰래 조사라도 했던걸까, 처음 들어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아가 한숨 쉬듯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순노부에 대한 것들은 모조리 지워졌으니까 말야. 넌 아무것도 몰 라 무건이 얼마나 잔인한 새낀지. 그 녀석- 순노부 말이야, 떨고 있 었다구. 벌써 오래전에 단종된 먼지 투성이 에어로카에 쳐박혀서, 질질 짜고 있었단 말야. 얼굴도 옷도 더러워져서 형편 없었어. " 듣고 싶지 않다. 저 녀석은 이상하다. 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해대니까, 순노부에 대해 알고 싶어서 돔 밖으로 나간 노아를 초조하게 기다 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돌아온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이 야기도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돔 밖에 있을 때 그.. 영상을 봤단 말야. 바보같은 꼴로 쭈그리고 앉아서 떨고 있었어. 순노부라는 녀석, 레일건Rail Gun으로 정확하 게 머리를 맞았다구. 에어로카 안쪽에 붙어있던 모니터로 무건이 보였지만 그 자식은 끝까지 미동하나 없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지 켜보는게 전부였으니까 말이지. 넌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완전 히 미친 새끼란 말야, 그건...... " 멸균실의 문을 열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지던 말이 뚝 끊겼다. 문 밖에 붙어 선채 가만히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는 얼굴은 어딘지 즐거워하는것처럼 눈가가 묘하게 찌푸려져 보였다. 어째서 이런 때에 이 녀석은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는걸까, 가만히 쳐다보자 문득 손을 내밀어서 내 뺨을 만지고 고개를 숙인 채 입술에 느닷없이 키스해 왔다. 입안으로 혀끝을 집어넣어서 아무렇지 않게 핥는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목덜미까지,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빨렸다. 정말로 이 녀석은 <노아>가 맞는건가? 노려보면서 늘 매섭게 비난을 퍼붓던 녀석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 도 된것처럼 생소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한다. 마치 연인에게 하듯이 키스해 오는 것이다. "전부 끝났어, 나류. 무건은 그런 놈이라구. 언제까지 널 가지고 위 원회와 사이를 벌이진 않을거란 말야. 돔 밖으로 내버려지기 전에 내가 널 도와주겠다는거야. 네가 도시 밖으로 나가서 제대로 살수 있을 것 같아? 물도 없고 산소도 턱없이 부족해. 병이 들어도 푸른 눈을 달고 있는 녀석한테 신약을 내줄 것 같냐구? 어림없어. 놈들 이 <배양 센터>의 남자들을 어느 정도로 증오하는지 넌 몰라, 바이 러스에 감염되기 전에 먼저 살해 당하고 말거다. " "...레일건이라고 했어? " 내 말에 노아는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뭐, 조그만 아이에겐 충분히 치명적이지. 그대로 즉사했다고 들었 으니까. " "죽는걸 봤어? " "아아, 해저 돔에 들어 갔을 때 놈들한테 보여 달라고 했어. 순노부 에 대한건 도시 내에서 불법 정보로 <탐색금지>가 되어 있으니까 말야. 어쨌든 그런것도 <거래 자료>인 셈이니까 돔 밖의 놈들이 영상을 보관하고 있었어. 도시에 불만을 갖고 있던 놈들이 분풀이 로 삼도록 조그만 녀석을 그냥 내버려 뒀단 말이야. 그 자식이 너 한테 뭐라고 둘러댔는지는 모르겠지만 순노부는 무건이 죽인거다, 그건 확실하니까. 그런 더러운 곳에 아무렇게나 내버려 뒀으니까 말이지. " 정말로 죽은거다. 세균 감염 같은 것이 아니라 레일건으로 살해 당했다. 처음보는 인간들 틈에서 무서워하고 떨면서, "무건은.....? " "내 말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농담인것처럼 들려? 오늘 아 침에 <강제소환> 되었다고 말했잖아. 무건은 이제 끝났단 말야. 쓸 모없는 유전자에, 내 아이까지 낳아줄수 있을는지 알수 없는 녀석 이지만 너는 내가 받아주겠어. 어쨌든 너도 전대 지도자의 피를 가 지고 있으니까 그만한 가치는 있단 말야. " 순간 녀석의 입꼬리를 말고 웃고 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보는, 시체처럼 파릿한 낯빛으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 본다. 눈 앞에 그대로 보이는 생소한 물건을 어째서 미리 깨닫지 못했던 걸까, 마치 끔찍하게 싫은 꿈의 한 장면이 실제로 재현되어서 눈 앞에 그 대로 펼쳐지고 있는 것 같다. 은색의 가늘고 길죽한 총구銃口가 정확하게 노아의 관자놀이 부근 을 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멸균실 안의 좁은 시야에 가려져서, 거실에 서있던 사람을 미처 보 지 못했다. "멋대로 구는 것도 정도가 있다. 원숭이가 함부로 휘젖고 다니는 곳 이 아니야. " 노아가 <강제소환>되었다고 말한 남자가, 무감정한 얼굴 그대로 아 무런 인기척도 없이 서서 노아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계속.. 나지막한 음성으로 경고한다. 망설임이나 안타까움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이 들고있는 은색의 쇠붙이처럼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그만둬. 뭘하는거야? " 총 끝으로 가만히 시선을 두고 있는 남자가 금방이라도 총탄을 쏠 까봐 심장이 오그라 붙는 기분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무건은 여유로운 태도에 반해 목소리도 얼굴도, 온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화내고 있는 것보다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얼굴이 훨씬 더 위협적 으로 보이니까 이상한 것이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곤란하다. 위협 같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쏠지도 모른다. 그럴 생각으로 대낮에 갑자기 이곳으로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문을 닫고 그 안으로 들어가 있어, 나류. " 무건이 손짓으로 내가 있는 멸균실의 문을 닫으라고 말해오고 있었 다. 그러자 파릿한 안색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노아가 뭐가 우스 운건지 문득 소리내서 웃었다. "뭐야, 무건 넌 내가 이 녀석을 죽이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거야? 난 이렇게 꼼짝할 수도 없는데? " 멸균실의 입구에 두 팔을 뻗대고 서서는 관자놀이 부근에 총구를 붙여놓고 한껏, 놀랐다는 듯이 크게 숨을 내뱉는다. "흥분하지 말고 좀 냉정해져 봐, 다짜꼬짜 들이닥쳐서 총부터 갖다 대면 어쩌라는거야-" "허튼 생각 말고 천천히 뒤로 돌아서서 걸어라. 아니면 지금 머리에 구멍을 뚫어줄까...? " "너한테 살해 당하기 직전인데 내가 지금 뭘 할수 있다구. " "돌아서서 움직이지 않으면 지금 네 머리를 으깨주겠어. " 농담같은 것이 아니라 기잉-하고 탄환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총신 옆에 붙은 작은 스위치를 누르면 무건의 말처럼 그대로 노아 의 머리 부분은 사라지게 된다. 탄환에 바이러스 캡슐이 들어있는 경우에는 그대로 즉사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거지? 그럴 듯 했는데 말이야. 죄목도, 시기도 적절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군. " 무건의 말대로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녀석이 한숨 을 내쉰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낭패를 본 듯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어쩐지 한순간에 느긋하게 바뀌었다. "오늘 아침에 위원회로부터 소환 당하지 않았나? 어떻게 네가 지금 여기에 있는거지, 응? " "네 놈의 반쪽짜리 뇌수는 썩은 물로 가득차 있나 보구나. 소환 명 령만 떨어지게 되면 끝이라고 정말로 믿은건가? 지금 네 자리를 내 가 설명해 줄까? 후계자의 존재 가치따위 지도자의 그림자로 충실 했을 때 뿐이다. 네 놈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너같은 후계자는 죽여 없애는게 규칙이지. " 아무것도 안보이는 얼굴로 무건이 태연하게 말해 젖히고 있었다. "그래, 그동안 돔 밖 구경은 재미있었나? '거래'라는 것은 잘 끝난 모양이더군. 받기로 한 <신약>은 언제 중앙정부로 넘어가게 되지? 위원회가 네 뜻대로 지도자를 처리해 주면 그 때 넘겨주기로 했나? 돔 바깥 놈들한테서 얻어낸 신약은 지도자를 죽여주기로 약속하고 얻어낸 댓가겠지? 확실히 성장기형의 돌연변이다운 발상이다. " "너무 몰아붙이지 마, 자신이 처한 입장부터 잘 돌아보라구. 아무리 궁지에 몰린 꼴이라지만 상황파악은 좀 해야지. 여기서 나를 쏘면, 너도 끝이야- 한번은 용서가 될지 몰라도 두 번은 어려울거다. 내 가 얘기해 줬단 말이야, 나류가 낳은 놈이 어떻게 죽었는지- 네가 어떤 식으로 죽였는지, 정보가 되는 것 따위 저 녀석이 알지 못하 도록 네가 모조리 지워 없애 버렸잖아? 그래서 내가 대신 말해준거 라구.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실제가 아니라 모니터를 통해서였을 뿐이었다고 해도 어쨌든 너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모니터로 확인 까지 한 주제에 설마 <위치파악이 불가능 했기 때문에> 다섯 살짜 리 아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뒀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봤 자 안달나 있는건 당신 혼자란 말야. 어디 평생을 미움 받으면서 한번 살아보라구. 나를 쏘면 넌 더이상 용서받을 수 도 없어." 여유로운 어조로 태평스러운 말을 내뱉는다. 머리에 총구가 들이밀어진 따위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투다. 절대로 쏘지 못할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저 녀석은 착각하고 있다. 몇 번이나 죽이겠다고 말해왔다. 무감정한 얼굴로, 몇 번씩이나- "당신한테는 안됐지만 위원회는 <지도자>가 아니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그림자>를 원하고 있어. 왕족이면서 놈들의 그림자로 충 실해줄 인간, 그러니까 바로 나같은. 연합정부는 왕족인 너에게 충 성했을지 모르겠지만 위원회는 아니야. 당신은 이미 놈들한테서 버 림받았어. 지도자와 신약을 맞바꾸자고 이야기 한건 나였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긴건 어디까지나 위원회였다구. 지금 나를 죽인다고 해 도 위원회가 널 배신했다는 건 변하지 않아. 후계자를 죽여 없앤 뒤에 놈들 한테서 쏟아질 질책은 어떻게 감당할거지? 게다가 너에 게는 약점까지 있지. 놈들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아무런 쓸모없는 <덤>이 붙어 있으니까. " 노아가, 부드러운 말투로 마치 타이르기라도 하는 듯이 말한다. 확실히 저 녀석은 이상하게 변했다. 어린애처럼 마구잡이로 비난하고 화내던 모습따위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표정을 만들어서 웃고 말한 다. 저런 얼굴로 돔 밖의 인간들과 거래,라는 것을 했던걸까. ".....재미있군. 더 떠들게 남아있나? " "나도 놈들의 그림자 노릇은 절대로 사양이라구. 이용 당해줄 마음 따위 조금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조용히 보내준다면 돔 안에 서 영원히 사라져 줄 생각이다.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지도자 를 갈아치우겠단 괘씸한 놈들도 나타나지 않겠지. 연방국 근처로는 머리 끝 하나 보이지 않겠어, 약속하지. 그 대신, 조건이 하나 있 다." "조건?" "네 옆에 있는 <쓸모없는 덤>은 내가 데려가게 해 줘. 나한테 주면 그 이상 어떤 조건도 달지 않겠어. " "......... " "다른 조건은 없다구. 분명히 약속할게. " "배양센터에서 길러지는 유아 정도의 면역력 밖에 없다. 발병이 되 면 사망시간은 보통의 인간보다도 훨씬 빨라져. " "신약이 있으니까. " "신약은 <해저 돔> 안에 있지. 누가 지도자를 없애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도시안의 '배신자,에게 신약을 내주지? 이대로 돔 밖을 나가 놈들 눈을 피하면서 평생 흙만 파먹으면서 살 생각인가? 발병이 되 면 푸른 눈을 하고 있는 인간을 위해 네 놈 눈 앞에 신약을 갖다 바쳐줄 놈이 도시 바깥에 있다는건가? 아니면 해저돔으로 침입해서 몰래 훔쳐내오기라도 할텐가? " "억지 쓰지마. 네가 처한 상황부터 제대로 돌아보라구. 어차피 데리 고 있어봤자 너한테 돌아갈 애정따위 조금도 없을테니까! 네가 바 라는 것따위 '저 녀석' 한테서만은 죽어도 얻어내지 못할거다. 나를 죽이고 난뒤엔 더더욱 말이지. 나는 지금 기회를 주겠다는 말을 하 는 거라구. " "그 정도 위안이 있으면 지금 죽는것도 억울하지만은 않겠군." 일말의 가책이라던가 너그러움 따위 완전히 잊은것처럼 태연하게 총을 겨누고 있는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실은 너 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무건이 얼마나 무감정한 얼굴을 갖고 있는지, 그런 얼굴로 내리는 결정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인한지 잘 알고 있다.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 내가 불쑥 꺼낸 말에 노아가 눈을 크게 뜨고 이 쪽을 물끄러미 쳐 다보았다. 멸균실의 문을 닫고 걸어 나와서, 무건이 쥐고 있는 레일건의 총구 쪽을 한 손으로 감싸쥐자 그제야 무건이 내 얼굴을 돌아본다. 깨닫지 못한 사이에 집안에는 무기를 든 무건의 수행원들이 들어와 있었다. 출입구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남자들이 도무지 언제부터 집안에 들어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에는 집안까지 출입하지 않는 인간들이다. <자질>을 문제 삼아 위원회가 지도자의 강제소환을 명령했다는건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르겠다. 정찰대원이 아닌 수행원이 레일건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따위 처음 보는 것이다. 중앙정부에 있는 수행원의 임무는 외부의 사고로부터 <지도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 상대를 향해 그대로 무기를 내보이며 위협 하는 따위 위급시가 아 니면 절대로 하지 않는다. 더구나 노아는 무기로 할 수 있는 것 따위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데 도 무건의 수행원들에게는 위험 인물로 분류되어져서 총으로 위협 받고 있는 것이다. "보내주세요. 돔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어차피 도시안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 같은거 예전에 지났으니까, 더 이상 규칙을 어길 수는 없어. "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으로 말을 내뱉았다. 정말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은, 오래전에 몇 번이고 달아나려고 하다가 붙잡혀오곤 하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틀린 것이다. 고약한 악성 유전자를 가진 내가 얼마나 무건을 곤란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처럼 저급 유전자를 가진 인간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도시 바 깥으로 쓰레기처럼 내버려지게 되던가 그나마 운이 좋으면 배양센 터에서 알을 낳는 일을 하게 된다. 인구를 늘 일정하게 유지 시켜야 하는 유리돔 안을 우수한 유전자 를 가진 인간들로만 채우는 방법인 것이다. 그게 도시안의 규칙이니까 할 수 없다. 나는 배양센터에 등록되어 있는 인간도 아니고 유전자가 좋은것도 아니니까 위원회가 규칙을 어긴채 도시안에 머무르고 있는 나를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사실은 당연했다. 무건이 지치지 않을리 없다. 게다가 강제소환까지 명령 받았다면 약점이 되는 것은 어떻게든 없 애버려야 하니까, 지금 당장 나를 도시 밖으로 내보낸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게 없 는 것이다.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무건의 얼굴은 언잖아 한다던가 곤란해 하는 기색 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 앞의 상황 따위 아무것도 안보이는것처럼 초연한 얼굴로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문득 입을 연다. "살리고 싶어? " 비난하고 있는 것도, 화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아냥 거리는것도 아니다. 정말로 묻고 있는 것이다. <저 녀석을 살리고 싶은가>하고, 진심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돔 경계선까지 에어슬랫(air slat)을 내주세요. 부탁합니다. " 노아가 말한 그대로 후계자가 사라지게 되면 지도자의 <강제소환> 따위 누구도 두 번다시 입에 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 녀석이 눈에 띄지 않으면 무건이 총을 겨눌 필요도 없어진다. 무슨 일이 생겼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중앙정부로 신약이 들어오는 것도, 노아가 돔 밖의 인간들에게 지도자를 없애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정 말로 있었다면, 그게 신약을 얻어내기 위한 거래 조건이었다면 당 연히 그것도 없던 것으로, 사실은, 더 이상 무건의 얼굴을 보기가 괴롭다. 목소리를 듣는 것도 피부에 닿는 것도, 나가달라고 말해올 때 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생각이었지만 어 쩐지 더 이상은 자신 없었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요구해 오는 조건은 절대로 수락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말했었 다.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전부다 끝났다>라고, 처음 순노부가 죽었다고 들었던 밤에 이 남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이미 죽었다,는 말에 어쩔 수 없는 사고 같은거라고 생각했다.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었던거라면 <사고> 같은 것이 아니다. 자고 있는 무건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대답대신 무건은 천천히 총을 쥔 손을 내리고 뒤에 서있던 수행원 에게 그것을 넘겼다. 이건 '알았다,는 뜻인걸까 하고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총을 뒤로 넘겨준 남자는 문득 내 몸을 껴안듯이 해서, 허리 뒤쪽으로 늘어져 있던 욕의의 가느다란 끈을 찾아내 앞으로 오게했다. 벌어져서 가슴께가 환히 드러나 보이는 욕의를 바로 잡아서 (욕의 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것 따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단정 하게 끈으로 고정시킨다. 어린아이처럼 취급받고 곤혹스러워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자 느닷없 이 뺨을 잡혔다. "나중에 보자. " 무심코 올려다 봐도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채, 이대로 둘 다 보내주겠다는 대답인건가, 생각해 보고 있는 사이에 내 얼굴에서 손을 떼고는 곧장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출구가 열리자 무기를 쥔 정찰병들과 정보부의 인간들이 서있는게 보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것처럼 자세를 바로 하고 서서, 무건이 나가 자 고개를 숙여보인다. 정찰병들은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맨션 안으로 정찰병들까지 들어오다니,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한 것이다. 무건이 나가자, 출입구의 문은 그대로 닫혀버렸다. "오늘 중으로 위원회의 의결이 모아질 겁니다. 지도자의 <강제 소 환>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위원회의 뜻대로 현 지도자는 폐 위될 예정이고 당신 눈앞에 있는 후계자께서 다음 대의 지도자가 됩니다. -이제 두번다시 당신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저희 로서는 유일하게 기쁜 일이군요. " 긴장감이 사라진 집안에서, 문득 화를 참는듯이 나직하게 입을 연 사람은 거실 한쪽에 서있던 무건의 수행원들 중 하나였다. 분명히, 내게 하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건가-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자 남자 는 노아의 머리쪽을 겨누고 있던 총을 천천히 내리고, 마치 더러운 세균 덩어리라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당신의 몸에는 항체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도 불완전한 유전자 때 문이겠지만 말입니다. 돔 밖으로 나가게 되면 수 분 내로 발병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께서는 현재 스스로의 힘으로 당신을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겁니다. 조금은 감사하 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 계속..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럴거라면 벌써 애초에 죽여 없앴습 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당신이 걱정 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들 리신 겁니다. 당신이 조용히 자리를 피해줬다면 아마 그대로 총으 로 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위원회의 결정대로 지도자께서 는 슬라임(slime)에 처해지게 될겁니다. 이제 살아서 두 번다시 볼 일은 없을테니 당신은 만족하시겠군요.] 출입구 밖으로 나가면서 무건의 수행원은 그렇게 내뱉았다.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런거라면 벌써 애초에 죽여 없앴다. 슬라임에 처해지게 된다, 살아서 보는 일은 두번다시 없을거다. 위원회가 그렇게 쉽게 중앙정부의 지도자를 처형할 수가 있다는 건 가, 슬라임은 신체를 유폐시키는 형이다. 글리세리드(glyceride)로 가득찬 좁은 액체관 속에 갇힌채 거대한 지하감옥으로 집어 넣어진다. 생체 활동은 액체관 속에 갇히게 되는 순간 완전히 정지된다. [나중에 보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건은 그렇게 말했다. 아쉬움이라던가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으 로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입술 끝이 조금 부드럽게 움직인듯한 기분도 들지만 그건 어쩌면 내 느낌 탓일는지도 모른다. 지도자를 폐위시키기 위한 재판이라면 그저 형식에 불과할 것이다. 재판은 위원회의 뜻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결과 또한 위원회가 원 하는 대로 나올테니까, 그런걸 저 남자는 몰랐던건가? 돔 밖으로 나가서 뭔가 살아갈 궁리를 해보기도 전에 바이러스로 죽는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었다. 그저 죽을뿐이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건가? 위원회 같은건 어차피 머리는 될 수 없으니까 왕족인 지도자가 필 요한 것이다. 노아는 떠나주겠다고 말했다. 노아가 말한 무건의 <쓸모없는 덤>이라는건 어쩌면 나를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어디든지 같이 가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남자다. 왜 그 때 보내주지 않았을까, 노아가 하는 말따위 믿을 수 없었던 건가? 녀석의 '떠나주겠다,는 말을 신용하지 않았던 걸까, 그게 아니면, 수행원의 말처럼 '항체'가 없는 나 때문에 정말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라도 했다는 건가? 끈질기게 몇 번이고 돔 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던 나를 그때마다 무 시무시한 얼굴로 붙잡았던건 실은 부족한 내 항체 때문이었다는 걸 까? 기계처럼 무미건조한 얼굴로 레일건을 손에 쥐고 있던 남자를 떠올 렸다. 조그만 신약 샘플 하나로 자신을 하루 아침에 최악의 상황으로 빠 트린 녀석을 이상할만큼 침착하게 건네다 보고 있었다. 저 남자는 노아에게 손끝하나 대지 않았다. 죽일것처럼 덤벼 들었다고 해도, 그대로 총을 쐈어도 적당한 구실 이 있으니까 사실은 상관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무건은 정말로 손끝하나 대지 않았다. 나는 무건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표정없이 총을 쥐고 사람을, 그것도 자신의 아들을 실제로 쏘는 인간이 그렇게 흔한걸까? 나는, 한번도 본적 없는 무건의 모습을 멋대로 상상하면서 혼자 괴 로워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다, 틀렸다. 무건은 보통의 인간과 다른 것이다. 오염된 도시 밖으로 사라진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 도 모른체 했던 남자다. 돔 밖의 인간들은 지도자에게 거래.라는 걸 요구했다. 그야말로 <거래>였다. 단순히 지도자를 모욕하기 위해서 아이를 죽여 없애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아니었다. 놈들은 거래라는 것을 요구했고 무건은 그걸 거절했던 거다. 그 결과로 순노부가 죽었다. 도대체 뭐가 <협상은 깨졌고 이미 녀석은 죽었다>라는 건가, 저 남자는 단순히 놈들의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것 뿐이었는데. 어두운 방안의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무건의 수행원에 게 전해 들었던 슬라임이라는 단어를 멍하니 떠올려 보고 있었다. 정말로 두 번다시 마주칠 일 따위 없을는지도 모른다. 액체관 속에 갇힌채, 어두운 지하감옥으로 영원히 유폐된다. 저 남자는 미쳤다. 순노부를 죽이면서까지 집착하던 자리가 아니었는가 말이다. (돔 바깥의 놈들이 지도자의 약점이 될만한 녀석을 볼모로 잡은뒤 에 뭘 요구했는지는 뻔하니까, 자신들을 위해 새로운 도시를 지어 달라는 요구였을지도 모르고, 혹은 중앙정부와 연합도시에 불만을 잔뜩 품은 인간들이니 뭔가 <보복>이 될만한 것을 말해왔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노아가 신약을 조건으로 약속했던 <지도자의 처 형>이라던가-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놈들이 바라던 대로 되었다.) 아들의 죽음에 터럭만큼의 죄책감도 보여주지 않았던 주제에 왜 갑 자기 그런 이상한 짓을 한걸까, 몰랐을리 없는 것이다. 연방정부의 지도자를 상대로 강제소환까지 결정한 놈들인데, 위원 회가 어떻게 나올는지 무건이 몰랐을리 없다. 도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고 크게 소리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약점이 되는 따위 그냥 모른체 했으면 좋았다. 노아가 원하는대로 돔 밖으로 얌전히 내보내 줬으면 좋았을 것이 다. 저 남자가 하는 행동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는 것들 뿐이다. 재판 같은건 벌써 끝나 있었다. 어떻게 됐을까, 놈들은 연방국의 지도자를 정말로 처형 하려는걸까, 틈만나면 무건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해서 비난을 퍼붓던 인간 들이다. '전부 끝났다, '강제소환 되었다-, 따위의 말을 입에 올리던 노아를 보면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건가,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분명히 전날, 무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늦는 일이 꽤 많았으니까,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건 뭔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걸까, 정말로 위원회가 지도자를 처형할 수 있다는건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이미 액체관 속에 시체가 되어 드 러누워있는 남자가 멋대로 떠올라서, 끊임없이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슬라임(slime)이라는건 뭐지? 슬라임으로 죽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 들인가? " [법적 제재에 관한 정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27개월 40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열람하신 자료로군요. 슬라임(slime)은 법률 상식에 관 한 단어입니다. 글리세리드(glyceride) 관속에 유죄 확정 판결이 내 려진 인간을 가두어 유폐시키는 형벌로 유형이 어려운 상위 계급의 인간들을 상대로 합니다. ] "유형? " [상위계급의 죄수들은 중앙정부의 내부 기관에 연관되어 있는 경우 가 많기 때문에 돔 밖으로의 추방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 위계급 중에서도 신체를 훼손시킬 수 없는 인간들은 슬라임에 처해 지게 됩니다. 생체활동이 정지 되어도 부폐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 "글리세리드(glyceride) 관 속에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 " [글리세리드는 사체를 경직시키지 않게 하기 때문에 포르말린을 이 용해서 표본을 만드는 형태와는 조금 다릅니다. 따라서 호흡이 가 능하게 되면 생체활동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슬라임 을 선고받은뒤 실제로 되살아 나온 예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커다란 모니터 안으로 슬라임 형을 선고받은 인간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제복 차림의 집행인과 의사들 이 모여서 벌거벗은 인간의 목덜미에 약품을 주사한다. 사지가 결박되어 있던 인간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잠시뒤에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걸 확인하자 집행인이 글리세리드 관 속에 생 체활동이 정지된 인간을 집어넣는다.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 [중앙정부의 정보부에서 일하던 인간입니다. 위험한 지역으로 정찰 대를 내보내 인명피해를 입힌 죄로 처형 되었습니다. 생체조직을 파괴하는 약품을 쓰기 때문에 고통이 있습니다. ] 컴퓨터의 화면은 바뀌어서, 이제 거대한 지하 감옥을 보여주고 있 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으로 이상한 빛을 내는 액체관들 이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떠 있었다. 그러니까 전부 슬라임으로 처형된 인간들의 묘지다. [이상입니다. 슬라임(slime)에 대해서 더 궁금하신 내용은 없습니 까? ] 푹신한 소파에 기대 앉아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컴퓨터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거대한 묘지를 보여주던 화면은 곧 투명한 유리막으로 바뀌어 사라 졌다. "<노아>는 어디에 있지? " [현재 위원회와 회의중이시군요. 죄송하지만 회의 내용은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 "어제 재판은 어떻게 되었어? " [죄송하지만 탐색 금지입니다. ] "무건은 언제 처형되는거지? " [죄송합니다. 탐색 금지입니다. ] "...무건은 순노부를 왜 죽게 내버려 뒀어? " [죄송하지만 탐색 금지입니다. 곤란한 질문은 안됩니다. ] 몇 번이나 똑같은 대답이 무미건조한 기계음으로 흘러나온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것도 없는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컴퓨터실의 출구를 닫고 나왔다. 시간은 새벽 3시를 지나 있었다. 거실의 유리벽 너머로 청회색의 건물들이 요란하게 불빛을 내고 있 었다. 낮에 짙은 보랏빛 구름이 소용돌이처럼 깔려있던 하늘은, 밤이 되 자 도시안의 불빛을 그대로 집어삼켜 투명하게 번쩍거리는 유리돔 으로 가로막혀 보였다. 낮동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밤이 되면 유리돔이 또렷하게 형체를 드러낸다. 검은 밤 하늘을 가리면서 도시의 불빛을 그대로 내비쳐 보이는 반 구의 유리막. 그것은 마치 무감정하게 비쳐보이는 인간의 동공瞳孔같기도 해서 어쩐지 기괴해 보였다. "뭐야, 기다리고 있었어? " 출입구를 열고 내가 서있는 창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노 아의 하얀 제복은 <지도자>가 입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직 무건은 처형 당하지 않았다는걸까. 새벽까지 위원회 놈들은 무슨 회의를 한걸까. 문득 뺨에 차가운 느낌이 닿아서 고개를 들자 녀석이 조금 눈썹을 찌푸린채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무도 닮지 않았다. 무건의 아이인데 유전형질,같은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건지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나서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어쨌든 처형일 은 나흘 뒤야. 내일 당장 처리해줘도 좋겠지만 연방국에 '수상'놈들 이 중앙정부로 모여야 처형이 가능하다더군. " 내 얼굴에서 손을 뗀 녀석이 문득 입가에 불온한 웃음을 떠올린다. 뺨에서 떨어진 손끝은 그대로 목덜미를 지나 욕의를 두른 가슴께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가슴에서 허리께로, 그리고는 한 손으로 욕의의 끈을 잡아 당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어. 무건이 왜 날 쏘지 않았는지 말 해줄까? 놈은 지금 아무런 힘이 없거든. 위원회 놈들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는거라구. 비겁하게 도망친 꼴이다. 나한테 널 떠맡기고 말이야. 넌 그 자식한테서 내버려진 거라구. 어차피 넌 상대가 누구 든 상관없을 테니까 괜찮겠지. 친형과 섹스해서 <알>까지 만들었 는데 니까짓 녀석한테 무슨 인륜이 있단 말이야? " 계속... "일우는 어떻게 된거지? 메시지가 연결되지 않아. " 아무렇게나 허리께를 쓰다듬는 손끝을 누르고, 노아의 얼굴을 물끄 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욕의의 끈을 잡아당기던 손이 간신히 멈춘다. 내 말에 노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녀석한테도 뭔가 일을 저지른건가? " "-일을 저질렀냐,고? " 순식간에 녀석의 음성이 험악해졌다. "근무태만이다-. 단순히 근신처분을 받은 것 뿐이라구. 그 자식을 이곳으로 불러들여서 무슨 말이 듣고 싶은거지? 컴퓨터가 너한테 말해주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건가? " 난폭하게 등 뒤의 유리벽이 두들겨졌다. 몇 번씩이나, 두꺼운 유리는 녀석이 주먹으로 내리칠때마다 부서질것처럼 세게 흔들렸다. 짐작조차 못할만큼 기묘한 감정 표현을 아무 스스럼없이 해댄다. 비아냥거리는 웃음이나 부드럽게 뒤바뀌는 표정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자, 녀석의 얼굴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흉폭한 감정만이 남아 있는것처럼 보였다. "무건의 처형일이 궁금했던거지? 그래서 내가 알려줬잖아. 무건이 왜 순노부 놈을 죽게 내버려뒀는지 그것도 궁금한건가? 어제 내가 말해줬던 이야기가 부족했어? 내 말이 믿기지가 않아? " 말의 내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녀석은 내가 몇 시간 전에 컴퓨터로 조회한 내용을 모조리 알고 있는 것이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조리 조사하게 하는건가? " "어차피 내 집이야. "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 같은건 그만둬. 네 입으로 떠들었 던것처럼 지도자라는건 위원회 놈들의 그림자 노릇이 전부다. 쓸모 없어지면 내버려지는 일을 도대체 왜 하겠다는거야? " "정말로 모르겠어? 왜 힘들게 돔 밖으로 나가 놈들 비위를 맞춰가 며 신약을 거래하고 내게 '유전자를 제공한, 녀석을 죽여 없애려는 지? " "말해주지 않는 내용을 혼자 확인하는 재주는 없어. " "나는, 너를 받아주겠다고 말했어. 그것 때문에 위원회 놈들과 거래 를 했어. 뭔가 더 이유가 필요한건가? " "이상한 소리 하지마! " "'이런 녀석 같은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얼굴로 무건의 옆에 붙어 있었잖아? 네가 원하는대로 해줬을 뿐이야. 내키지도 않는 중 앙정부의 족쇄까지 마다하지 않고 말이지. " 머리가 깨질것처럼 아파져서 창가의 소파에 아무렇게나 기대 앉았 다. 어쩐지 몸이 떨리는듯한 기분이 든다. 가만히 등을 구부린채 쥐가 나는 것 처럼 저리는 하얗게 변색된 손 끝을 감싸쥐고 있었다. "흠분하지 말라구.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혼란스러운거야. 넌 아무 생각 안해도 돼.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 시간이 지나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테니까... " 유백색의 투명한 유리 바닥 위로 노아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물끄러미 쳐다보자, 녀석이 가만히 내 얼굴을 감싸쥔다. 이 녀석은 이상한 것이다. 몇 번씩이나 마음대로 표정과 말투를 바꾼다. 조금전의 불같이 화내던 모습 같은건 전혀 모른다는 듯이, 안타까울만큼 나약한 눈빛을 한다. 거래를 말하는 신중한 눈빛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르는 흉폭한 눈빛도 아니었다. 내버려질까 무서워 하는 것 처럼 보이는 눈. 매달리는듯이 약하고 무방비해 보이는 얼굴로 가만히 내 뺨을 만지 고 있었다. 처음보는 기묘한 얼굴에 이끌려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그대로 입술에 키스 받았다. 축축한 혀가 천천히 입안을 더듬다가 떨어진다. "...<인륜>같은건 몰라. 애초에 선택이란걸 할 수 있었던 처지도 아 니었으니까 그런 것 생각해 본적 없어. "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노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좋아. 상관없다구. " -정말로 이젠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의심'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저 남자 때문에 끊임없이 머릿속을 괴롭혔던 것들-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은 다시 망설이지 않고 냉정 하게 잘라내 버리는 잔인함이라던가, 어디에도 쓸모없는, 언제 내버려질지 모르는 존재에 '나 자신'이 포 함되어 있을거라는 불안감, 그런 따위,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무슨 소리야? " "무건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관없어. 어떤 인간 인지 같은건 이제 됐으니까. 머리가 없는 놈이라고 날 욕해도 좋아, 좋을대로 비난해도 돼. 내가 뭘하면 될까? 위원회 놈들을 찾아가서 연방국의 규칙을 제멋대로 어기고 있는 있는건 바로 나니까 그 남 자는 내버려 두라고 매달리면 될까? 네가 말해 봐, 내가 뭘하면 좋 은지- " 잠시 얼굴에 드러나 보였던 부드러운 기색은 마치 가면을 쓰고 있 었던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내 뺨에서 떼낸 손을 바닥에 대고 있던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 놓은 녀석은 화를 누르는 것처럼 가만히 내 얼굴을 노려보다가, 문 득 입가를 일그러 뜨리고는 섬뜩할 만큼 차가운 눈으로 웃어 보였 다. "잊고 있는 모양인데 어제 지도자를 위원회 놈들 손에 넘겨준건 내 가 아니라 너였어. 너 같은 놈이 지켜줄 의리라는게 다 있다니 놀 라서 기절하겠군. 몇 번씩이나 그 자식한테서 몰래 달아났던건 다 뭐였어? 달아날 만큼 싫었던거 아니었어? 그런데 위원회 놈들을 찾 아가서 살려달라고 빌고 싶을만큼의 애정이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거냐구? " "달아났던건, 오래전 일이야. " "아, 그렇지. 그 조그만 놈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지. 이미 죽은 놈 같은건 아무래도 좋을만큼 그 자식이 걱정돼? 배양센터 같은건 구경도 못해본 꼬마라 <누구>한테서 엄청나게 귀여움 받고 자란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나보군. 안 말릴테니까 가서 그 자식을 살 려내라고 빌어봐. 죄의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놈이 사정하면 서 매달리는거 나도 한번 보고 싶으니까. " 살려 달라고 빌어서, 살릴 수 있는거면 얼마든지 빌어줄 수 있다. '알,같은건 낳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걸로 이용 당해주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도망치던 무렵에도, 무건이 병으로 죽게되거나 처형되길 바랬던 적은 없었다. 내 손으로 목을 졸라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게 전부로 실 제로 죽여도 내가 없애주는게 낫다. 저 남자가 끈적한 액체 덩어리 속에 집어 넣어지는 따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 붙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나흘후면 정말로 무건은 죽는다. 두 번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컴퓨터가 보여준 영상 그대로, 잔인하게 생체조직을 파괴 시켜서- 보란 듯이 나가 주겠다고 생각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무건의 입으로 내키는 곳 어디로든 가도 좋다는 말을 듣게 될 때는 태연한 얼굴로 이 곳을 나가주겠다고, 지금이 머릿속으로 생각해둔 그 때일지도 모른다. 다른건, 사라지는게 내가 아니라 저 남자라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처형일을 노아의 입으로 전해 들은 순간, 재판을 했다는 것 따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마치 전혀 생소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머 릿속이 엉망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일단 중앙정부 부근까지 가면 일우를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은 시간이 이른데다 근신처분 되었다고 하니까 정보부에는 없 을테고 녀석의 집으로 찾아가면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도시 안에서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인간은 그 녀석 뿐이니까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소파에서 일어나서 곧장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다가 뒤쪽에서 팔을 세게 붙잡혔다. 뒤돌아 보자 조금전의 화내고 있던 표정은 생각도 안날만큼 사납게 노려보는 얼굴이 있었다. "어딜 가는거야? " "위원회 놈들한테로 가서 빌어주겠어. '후계자'는 이미 연방국을 떠 났다고 말할거니까. 중앙정부의 족쇄 따위 내키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같이 돔 밖으로 나가는거다. 어디든지 같이 가줄테니까- " "어딜가서 누굴 만나겠다는거야! 정신 나갔어?" 제 정신이 아닌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채 미친 듯이 소리 지른 다. 잡혀있는 팔이 아파져서 뿌리치려고 하다가, 그대로 녀석의 코 앞 까지 아무렇게나 끌려갔다. "그 빌어먹을 놈이 그렇게 신경쓰여? 그 자식을 재판한 놈들을 찾 아가서 엎드려 빌고 싶을만큼? " "....그래! 죽여도 내가 죽일거니까 지금은 아무도 손 못대. " "정신나간 소리 하지마. 나는 연방국을 안떠날거고 너도 절대 못나 가. 네가 살려달라고 한마디 하면 그걸로 놈들이 지도자를 재판했 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것 같아? 제 발로 뛰쳐나가지 않아도 그 자식들 눈에 띄면 충분히 곤란하니까 제발 피곤하게 굴지 말란 말 이야! " 단단하게 팔을 붙잡힌채 침실까지 마구잡이로 끌어 당겨져서 놀랐 다. 침실 입구가 열리자마자 무심코 신음 소리가 새나올만큼 세게 내팽 게 쳐져서 침대 다리 쪽의 모서리 부분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진채 어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고 있자 잠자코 서 있던 녀석이 다가와서, 느슨하게 끈이 풀린 욕의의 깃을 벌리고 가슴에서 배, 그 밑의 옅은 음모가 드러난 성기까지 마치 조사라도 해보는것처럼 손등으로 천천히, 어루만졌다. "며칠내로 연방국의 <수상>들이 도착할테니까 그때까지 얌전히 굴 어. 바보같은 짓하면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이제껏 지도자로 있던 자식 옆에 붙어서 네 잇속 차려가며 요령좋게 지내왔잖아? 앞으로 도 달라지는건 없어. 그러니까- 어떤 행동이 네 놈 신상에 유리할 지 한번 고민해 보란 말이야. " "친형과 섹스하는거 구역질 난다고 하지 않았어..? " "아아.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돌 것 같으니까 가만히 입다물고 있 어." 허리까지 벗겨진 욕의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와서 이번에는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고간을 쓸어올리고 마치 물어 뜯을것처럼 드러 난 가슴에 이를 세우고 키스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도, 일우가 했던 말도 전부 틀렸다. 노아가 돔 밖의 인간들과 신약을 거래했던건 무건의 말처럼 중앙정 부에 바라는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이 녀석은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알을 낳아준 숙주宿主와 섹스하려는 인간 같은거 들어본적 없어. " "얼굴도 모르는 배양센터의 숙주를 누가 가지고 싶어하지? 자신을 기주寄主라고 생각해? 그렇게 불러줄까? " 내 말에 노아가 아무렇게나 콧웃음 친다. 온 몸에 키스 받았다.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욕심 부리는듯한 키스. 가슴위로 빨갛게 울혈이 지고 점점이 멍이 퍼져서 배와 허벅지까지 깨문 자국이 남았다. 어쩌면 장난 같은 것이 아니라 이 녀석은 정말로 <알>을 원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이제 나는 알 같은건 더 이상 낳아줄 수 없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2번씩이나 그런걸 낳은게 이상한 거니까, 섹스 하거나 해도 두 번 다시 똑같은 것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발가벗은채 아무렇게나 침대에 안아 올려지고, 등에 차가운 시트가 닿는 순간 크게 벌려진 내 허벅지 사이로 검게 음모가 돋아난 녀석 의 것이 보였다. 하의에서 밖으로 튀어 나와있는 고간 사이의 것은 발기해서 단단하 게 굳어져 있었다. "그럼, 내가 죽어주면 위원회의 그림자 노릇은 그만둘거냐?" 그대로 허벅지 안쪽으로 곧장 밀고 들어오려는 녀석에게 말을 내뱉 는다. 나 때문에 위원회와 거래라는걸 했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없어지면 중앙정부의 족쇄가 되는 따위 그만둬주지 않 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뱉은 말에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는 얼굴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가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뺨을 세 게 얻어 맞았다. 계속.. "입에서 나오는대로 함부로 지껄이지 마. 죽고 싶으면 내가 죽여줄 테니까 넌 네 몸에 손 끝 하나도 못 대." 콧속이 시큰거리더니 곧바로 기침이 나왔다. 시트로 입가를 누르자 흥건하게 피가 묻어나와서 몇 번이고 닦아내 야했다. 찢어질것처럼 아픈 얼굴의 통증을 누르고 있는 사이에 녀석이 꽉 다문 잇사이로 그렇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숙주를 원하는 아이 같은건 이상하다. 무건도 충분히 이상한 남자였지만 이 녀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은 <알>이 생길까봐 무서운 지도 모른다. 두 번씩이나 뱃속에 알이 생겼었다. 절대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 번째가 생기지 않을거라는 확신 도 없으니까, 저 녀석의 알이 생긴다는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다. 노아도 성장기형이라는 것을 달고 태어 났으니까 이 녀석의 아이는 어떤 기형의 인간으로 태어나게 될는지 알 수 없다. 내 뺨을 후려친뒤 그대로 침대 머리의 단단한 지지대를 주먹으로 부서뜨린 노아는 낮게 욕을 내뱉고 나더니, 그대로 침실 밖으로 걸 어 나가 버렸다. 끊임없이 머리가 징징,하고 울린다. 침대에 드러누운채 약하게 조명등이 켜져있는 하얀 천장을 보고 있 다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다. 꼭 닫힌 창을 조금 열자 낮게 깔린 구름이 햇빛을 완전히 가려서 바깥은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어쩌면 유리돔 위로 비가 떨어지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얗고 차가운 눈이라는건 이미 오래전에 종적을 감춰 버렸지만 먼 지와 세균이 뒤섞인 검은 비라면 아직도 내리고 있다. 이 곳이 아니라 돔 바깥으로. 눈도, 비도 한번도 본 적 없었다. 무건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절대 프로그램에 입력해 주지 않았으니 까 홀로그램으로도 안되었다. 순노부가 눈을 보고 싶어해서, 눈은 괜찮지 않을까 하고 무건한테 말해본적이 있었지만 저 남자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물끄 러미 내 얼굴을 보면서 웃기만 했다. <비나 눈이라는건 차갑고 축축해서 저항력이 약한 녀석은 병이 생 기기 쉽다>하고 말해준 것은 일우였다. 무건을 보고 '심각한 신경증 환자'라고 욕하면서 그렇게 덧붙여준 것이다. 따가운 햇살의 홀로그램도 안되었다. 그건 시력이 안좋아 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제나 부드러운 바람과 따스하게 기울어져가는 햇빛이 펼쳐져 있 는 홀로그램 뿐이었다. 짙은 군청색의 부드럽게 반짝거리는 밤 하늘이라던가 바람과 함께 살며시 흔들리는 황금빛의 풀이 자라난 초원이라던가... 그런걸 떠올리자 어쩐지 부서질것처럼 울리던 머릿속도 점차 가라 앉아서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맨발 끝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입술이 쓰려서 무심코 건드리자 갈색으로 말라붙은 상처가 벌어져 서 새빨갛게 피가 묻어 나온다. 입도 뗄 수 없을만큼 입안에도 상처가 생겼다.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입가를 닦고, 일어나서 옷을 갈아 입은뒤 거 실로 나갔다. 잠깐 출입구 앞에 서서 모니터를 통해 복도를 살펴보자 검은 제복 차림을 한 수행원들의 숫자가 역시 어제밤보다 좀 더 늘어나 있었 다. 맨션만 벗어나면 중앙정부까지 움직일 수 있는건 어떻게든 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곳은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에서 나온 인간들이 많으니까, 에어슬랫의 작동법 따위 전혀 모르지만 <자동 시스템>이 달려있을 테니까 상관 없었다. 무건이 있을때는 내 생체조직이 인식이 되어서 출입구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일이 불가능 했었지만 어떻게 된건지 어느 틈엔가 그런건 아무 상관 없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바깥의 수행원들만 피할수 있으면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어디에서 이런 감정이 튀어 나온건지 의아할 만큼 절실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나가서 일우를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좋은 말 같은건 듣 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클지 모른다. 운이 나쁘면 이번에 그 녀석은 근신처분이 아니라 해임을 당할지 도, 무건처럼 재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만나보지 않는 편이 좋을는지도 모른다. 처형을 앞두고 있는 지도자를 위한 모의 죄는 충분히 무거울 테니 까. 하지만 고민해 볼수록 가능성이라는건 희박해 보였다. 일우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볼 수 가 없었다. 무슨 수로 중앙정부 건물까지 들어가서, 무건이 어떻게 되어 있는 지 알아 볼 수가 있을까. 일우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중앙정부에서 일하지도 않을뿐더러 신분증도 없고 외모에서부터 차 이가 나니까 금방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아까지 알아차리게 된다. 그건 곤란하다. 이 곳에서 나가면 나는 두 번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무건이 처형 당하는걸 확인하게 되면 면역체가 어떻든 돔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선은 이곳부터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나직하게 구름이 깔려있는 하늘은 그래도 유리돔 밖으로 보이는 하 늘과는 엄청나게 생긴 모양이 달랐다. 우선, 짙은 보랏빛이 섞인 회색의 구름이 아니라(이건 정말 기분 나 쁜 색이다) 손끝으로 만져보고 싶은 기분이 들만큼 새하얀 구름이 크림처럼 부드럽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빠르게 움직이기까지 한 다.) 정원에 피어있는 작고 약한 스킬라 꽃처럼 투명한 파란색으로 비쳐 보이는 하늘 역시 실제의 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하늘도 부드럽게 떠있는 구름도, 따스한 햇살이라던가 하늘과 맞닿 을만큼 넓게 펼쳐져 있는 황금빛의 밀밭도 모조리 홀로그램 속의 풍경이었다. 내가 나류 2라던가 나류 3이라고 이름 붙여준 홀로그램 속의 인간 들은 예전과 똑같은 얼굴로 걱정스러운 듯이 내 머리를 토닥여 주 거나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거나 했다. 아주 오래전, 지금과 전혀 다른 이유로 이 곳을 나가려고 하다가 몇 번이나 실패해 다시 끌려 들어왔을 때도 녀석들은 끈기있게 내 말을 들어주고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면 머리를 토닥여 주거나 했었 다. 그동안 나를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지만 어차피 프로그램 되어있는 녀석들이니까 정보가 지워지지 않는 이상 기억에서 잊는 다,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문득 허리 뒤쪽이 가볍게 당겨진 느낌이 든 것은 홀로그램에서 나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로, 걸어가는 도중에 다시 몇 번씩이나 잡아 당겨지게 되었다. 무심코 뒤돌아 보자 어쩐일인지 내가 서있는 밀밭에 다섯 살 정도 의 조그만 사내아이가 같이 서 있었다. 처음보는 녀석이 내 상의를 꼭 잡은채 말끄러미 내 얼굴을 올려다 봐서, 의아해졌다. 이 곳에 있는 홀로그램 속의 인간들은 무건이 전부 내 얼굴과 똑같 은 녀석으로 프로그램 해두었었기 때문에 다른 얼굴은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처음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켜둔 것은 인간이 나오는 홀로그램이 아니었다. 바람과 부드러운 햇살이 있는 풍경 속이다. 어떻게 이 곳으로 흘러 들어온걸까. 홀로그램에 뭔가 문제가 생긴건가,하고 생각해 보고 있는 사이에 조그만 녀석이 갑자기 푸-하고 한숨같은 것을 내쉬었다. "자기는 수족관 같은건 모른대요. 물고기가 보고 싶어~ 하고 말했 더니 물고기가 뭐냐고 저한테 물었어요. " 갑자기 나타난 녀석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뜬금없는 말을 꺼내고 있 었다. 불만스럽게 내밀어지는 어린아이의 높은 목소리에 눈썹을 모으고 뭔가 할말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이름이라던가, 어디에서 왔는지 하는. 하지만 그 전에 내 상의를 꼭 붙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녀석이 다 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심심하다고 울어서 한참이나 곁에 있어줬어요. 나 말이죠, 여기서 '나류'를 봤다고 순노부한테 전해 줄게요. 아기처럼 자꾸만 울어대서 이제 가봐야겠어요. 왜 순노부를 불러주지 않아요? 예전 에는 며칠씩이나 오지 않은 날도 많았었는데 요즘은 맨날 <그 곳> 에 있어요. 순노부는 3차원 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데 오래 있으면 안돼요. " ".....순노부? " "네. 조금 이상한 녀석이 되버렸어요. '챠피'라고 말해줘도 전혀 기 억을 못하니까요. 그치만 그 녀석은 순노부가 맞아요. 날 모른체 해 버려서 사실은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요. " 야무지게 대답하는 녀석을 어딘지 비현실적인 기분이 되어서 멍하 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챠피라니... 어딘지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녀석이 다시 높다란 목소리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말이죠~ 당신이 누군지 아까 한 번에 알아봤어요. 푸른눈을 하고 있는 인간들은 잘 볼 수 없거든요. " 아아.. 얼굴이 틀린 홀로그램 속의 인간이 하나 있었다. 이 녀석은 일우가 순노부에게 선물해 주었던 프로그램이다. 그러니까 일우가 가져다 주지 못한 <브라우니에 대한 사과>의 표 시로.. "순노부라고 말했어...? " 챠피라는 이 녀석은 어딘가 머리가 고장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기억이 혼선 되어서 제멋대로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한참이나 전의 일을 마치 방금 일어난 것 처럼 말하고 있으니까. "응~ 그러니까, 홀로그램 속에.. 의료센터의 지하 건물 안에서 제가 찾아냈어요. " 계속.. 유아용의 언어를 쓰는 홀로그램 속의 아이는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노란 풀밭을 밟고 있던 내 손을 살그머니 붙잡고 귓속말이라도 하 려는 것처럼 조그만 발의 뒤꿈치를 들어올려 보였다. 허리를 구부려주자, 내 귓가에 작고 통통한 손을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 말이죠. 사실은 먼지 투성이 에어로카 속에서 죽어 가는 영상 을 봤어요. 너무 슬퍼서 한참을 울었었는데 5주쯤 전에 우연히 프 로그램 속을 돌아 다니다가 그 녀석을 보게 됐어요. 쬐금 이상한 녀석이 되어 있긴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었어요. 너무 기뻐서 손을 잡고 잘됐다!하고 소리쳤지만 바보같은 녀석이 겁을 집어먹고 울려고 하잖아요. 혹시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는거라면 가서 위로 해 주세요. 순노부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요. 당 신을 보면 조금 기운을 낼지도 몰라요. 맨날 나류에 대한 이야기만 했었으니까, 틀림없이 기뻐할 거에요. " 교활함이나 거짓말 따위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잘도 떠들어대 고 있었다. "에어로카? " "응. 단종된 지저분한 에어로카에 타고 있었어요. 바이러스에 감염 돼 버려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챠피-의 얼굴을 감싸쥐고 있 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녀석의 얼굴 을 단단히 붙잡고 뚫어질 것 처럼 쳐다보자, 조그맣게 눈썹을 찌푸 린 아이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떠올려 보였다. "내가 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지? " "....응? 뭐가요? " "순노부가 의료센터의 지하 건물에 있다는거 말이야. "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 녀석을 불러주지 않아요? 전에는 늘 홀로그램 밖에서 순노부를 불러 줬었잖아요. 그러면 순노부는 아무 리 곁에 있어달라고 졸라대도 금방 당신한테로 달려가 버렸다구 요." "...그런데..? " "그런데 요즘은 늘 홀로그램 안에서만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침대 도 있고 프릴이 달린 조그만 배게도 있어요. 머핀이라던가 젤리 같 은 것도 잔뜩 있지만 아무도 그 녀석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놀아 주지도 않아요. " "넌 어떻게 <의료 센터>까지 들어간거야?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원래 프로그램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건가? " "제가 있는 홀로그램에 바이러스가 생겼다고 중앙정부에 신고할 건 가요? " "바이러스라고? 아아, 절대 신고하지 않을게. " "으응....그러니까 원래는 이 곳에만 있었어요. 그런데 순노부가 죽 고 나서 무지 슬퍼졌거든요. 그것뿐이었는데 깨닫고 보니 전혀 다 른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가 있었어요. 새파란 초원이나 햇빛이 내 리쬐거나 조그만 동물들이 있는 그런 곳 말이에요. 조금만 감정을 조절하면 가능 했으니까 그 뒤로도 종종 프로그램을 돌아다니게 됐 어요. 그렇게 하다가 의료센터의 홀로그램에까지 들어가게 된거에 요." "단종된 에어로카에 순노부가 있다는건 어떻게 알았어? " 내 말에 조그만 녀석이 어쩐지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한다.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제가 있는 홀로그램에 바이러스가 생긴걸지 도 모른다고요. 중앙 컴퓨터로 인식되는 정보나 메시지는 전부 들 여다 볼 수 있어요. 보고 싶어서 보는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저절로 인식이 된다구요. " 입이 딱 벌어질만큼 희안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대고 있는 녀석이 도무지 현실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이라고(아무리 인간 의 손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해도) 생각 되어지지 않 아서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거나 내가 원하는대로 환상을 보고 있 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자신을 '챠피'라고 말한 이 녀석은 내가 홀로그램 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고 사실은 이 곳에 있거나 하지 않는 존재다. 그게 아니면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거나, 나는 잠에서 깬적도 없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난적 도 없고 홀로그램 안으로 들어와 나류 2라던가 나류 3이라던가 하 는 녀석들한테 위로 받은적도 없다. 이것은 꿈의 연속인 것이다. 챠피는 순노부가 아직 살아있을 때 녀석이 좋아했던 홀로그램 속의 조그만 유아였다. 감성이 지나치게 높게 조절되어 있는 녀석이라고 걱정을 했던 적도 있었다. 유일하게 순노부를 알고 있는 홀로그램이었다. 현실을 도피해서 멋대로 숨어든, 거짓으로 꾸며진 방 안에서 순노 부를 잘 알고 있는 녀석을 내가 꿈이나 환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리운 아이를 불러들여서,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이야기하게 한다. 내가 아무리 해도 알아낼 수 없던 중앙 컴퓨터의 탐색 금지된 자료 들을 멋대로 읽어내게 하고, 이미 죽어버린 순노부가 살아있다고 말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그런데도 이 조그만 녀석을 놔줄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짓으로 꾸며진 환상일 뿐이라고 해도 듣고 싶은 것이 있 었다. 괴로운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찰나의, 꿈처럼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해도 듣게 되는 말에 다시 한번 끔찍한 절망과 괴로움을 맛보게 된 다고 해도(왜냐하면 이 녀석은 현실 같은건 전혀 상관없이 내가 당 장 듣고 싶어하는 말만 지껄여댈테니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 다. "그 녀석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버렸다고 했니? " "으응~ 그래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어요. 얼굴이 새파랗게 돼서, 정말 무서웠어요. " "얼굴을 봤어? " "응. " "많이 괴로워 보이지는 않았니? "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기대하면서 묻는다. 이 녀석은 어차피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테니 내가 원하는 그런 대 답을 해줄 것이다. 레일건으로 살해 당한적 따윈 없다. 달콤한 꿈이라도 꾸듯이 조용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괴롭지도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를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살해 당했다는 기억을 가지고 죽지는 않았을거야. 그렇지? " "<살해>라구요? " 나도 모르게 불쑥 꺼낸 말에 눈 앞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아, 그래. " "그렇지 않아요. <살해> 당한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 녀석은 돔 바깥의 모래 사막 한가운데 있었어요. 차 안에 있었지만 너무 너무 지저분했어요. 신도 신지 않았구요, 돔 밖의 인간들이랑 똑같이 말 이죠. '중앙정부'의 AI(인공지능) 컴퓨터가 잠깐 프로그램을 바꾼적 이 있었는데 연방국으로부터 중앙정부의 컴퓨터 시스템을 차단시키 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어쨌든 그 때 갑자기 중앙 컴퓨터로 흘러들 어오는 정보를 읽게 됐는데 말이죠~ 제가 봤어요. 그 녀석이 아팠 던건 '누군가가 억지로 생명을 빼앗았기 때문'이 아니라 돔 밖의 바 이러스 때문에 발병이 됐기 때문이었어요. 인간들이 이야기 하는걸 들었거든요. 틀림없어요. " "바이러스라고... " "네- " "그 남자는- 순노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지? 위치 파악이 불 가능 했기 때문에 정찰대를 보내지 않았던게 아니었어. 왜 죽게 내 버려 둔거지? 신약을 구할 수 없었던 건가? 왜 무건은 순노부를 죽 게 내버려 뒀어? 혹시 그런 것도 알고 있니? " "에? 그건 대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바이러스에 감염된거였다면 병이 더 진행되기 전에 구해냈어야 했 잖아. 대체 돔 밖의 인간들과 거래하려던 것이 뭐였어? " "그치만~ 말이죠, 그건 어쩔 수 없었다구요. 순노부는 벌써 바이러 스에 감염돼 있었고 돔 바깥의 인간들이 그런---" 처음에는, 홀로그램에 노이즈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눈 앞으로 보이는 정 중앙의 풍경이 사선으로 쪼개지더니 그것이 가느다란 균열을 일으키며 주위로 빠르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바람도 멈춰 있었고 황금빛의 밀밭이나 하늘은 마치 거대한 거울처 럼 공중에서 완전히 부서져 흩어져 내렸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다. 어차피 홀로그램이었을 뿐이었는데 방금전까지 서있었던 공간이 흔 적도 없이 부서져 사라져 가는 광경은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얼굴을 감싸쥐고 있던 아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 았다. 뭐라고 열심히 이야기 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서 얼굴 을 바짝 갖다댄 순간, 등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따스한 감촉이 커다랗게 생긴 균열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위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각막의 속임수로 꾸며진 풍경 따위 깨끗하게 사라진 아무것도 없는 공간. 멍하니 텅빈 방안을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뒤돌아 서자 방의 입 구쪽으로, 머리카락에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노아가 보였 다. 무건의 욕의 차림으로 한 손에는 총을 쥐고서. 무시무시한 얼굴로 서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본다. 중앙정부로 가버렸을 거라고, 아직 이 곳으로 돌아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도착할 때 까지 좀 더 시간이 걸릴거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틀렸다. 저 녀석은 지금 이 곳에 있으니까. 어쩌면 하루종일 맨션에 남아 있다가 잠깐 욕실을 썼는지도 모른 다. 아니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니까, 내가 홀로그램을 보고 있던 사이에 벌써 중앙 정부에서 돌아온 걸지도. 방금전까지 손 끝에 만져지던 조그만 녀석은 내가 내 마음대로 만 들어낸 환상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저기에 서있는 녀석은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환상이라면 저런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어차피 환상이라면 틀림없이 좀더 달콤한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다정하게 입가를 올리고 웃는 얼굴이라던가, 좀 더 아이답게 이야기하는 목소리라던가 하는. "저 쓰레기 프로그램 한테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해 봐, 나 류. " "......아아, 거짓말을 들었어. " 아무래도 좋은 기분으로 무감정하게 대꾸한다. "뭘 말이야? 레일건이 아니라 바이러스로 죽은 것? " 노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내가 아이한테서 들었던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콧웃음치고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와 아이와 이야기 하느라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던 내 팔을 붙잡아 일으 켜 세웠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거야? 총이 아니라 바이러스면 죽은 놈이 다시 살아 돌아와? " 말끄러미 쳐다보자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린 홀로그램 따위 이미 관 심 없다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 "생각을 해보라구. 신약이 있다고 해도 이미 바이러스로 숨이 끊어 진 놈을 되살려내는 방법 같은건 없어. 바이러스에 감염됐든 총을 맞았든 결과는 똑같아. 어쨌든 그 녀석은 거래가 끝난 동시에 죽어 버렸으니까. " 정말인가? 레일건으로 살해 당한 것이 아니었던건가? 그럼 이 녀석은 어제 이곳으로 찾아와서 나한테 거짓말을 했던건 가? <챠피>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걸까? 챠피는 의료 센터의 지하 건물에 순노부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거기서 울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 말이 사실일까? 도대체 왜 그런 곳에 아이가 있다는 걸까. 무건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사실이라면 절대로 무건이 몰랐을리 없는데. 지금 내 앞에 서있는 녀석은 순노부가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따위 조금도 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분명하게, 죽었다고 단언하는 말을 했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레일건으로 살해 당했다고 거짓말 한건 이 녀석 이 무건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로, 화면을 통해서였을 뿐이라고 해도 분명히 그 자리에 있 었던 무건을 잔혹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살아있는 순노부를 죽었다고 거짓말 할 이유같은 건 없는 것이다. 분명히 노아는 처음부터 홀로그램을 보고 있지 않았다. 챠피가 이야기하는걸 처음부터 듣고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순노부가 살아있다는 의심을 했을 것이다. "의사가 넌 치아가 안좋기 때문에 식사를 해야 한다고 말해줬어. 여기서 어물쩡 거리지 말고 식당으로 나와. " 노아가 찢어져 있는 내 입가를 손 끝으로 가만히 만지다가 문득 생 각난 것 처럼 입을 열었다. "그리고... 때린건 내가 잘못했어. 두 번다시 손대지 않을게. 약속 해." 말해놓고 어쩐지 입술을 꾹 깨문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입가에서 손을 떼고 불쑥 내 손목을 잡았다. 오늘 새벽처럼 마구잡이로 잡아 당기는 것이 아니라 살며시 조심스 럽게 붙잡는 것이다. 틀림없이 얼마전에 노아가 이런 행동을 했다면 귀엽다고 생각하고 웃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해도 웃어 보일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은 이상하다. 사실은 조금 무섭다. 아무렇게나 소리 지르고 난폭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무서운 것 이 아니다. 노아는 어린애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도 아니었다. 어른도 아니고 상식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도 아니다. 그런 것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가슴 속에서 스며나오는 감정에 그렇게 이름을 붙여놓고 나자 어쩐 지 서글픈 기분이 들어서 무심코 흘러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 계속 눈에 익숙한 요리들이 식탁 위에 잔뜩 놓여져 있었다. (집안의 거실 한쪽에 붙어있는 식당은 그렇잖아도 일우가<유물실> 이라고 부르는 침실보다 훨씬 더 고전적으로 되어 있어서 커다란 식탁이나 의자 같은 것이 매끈한 나무로 아주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여져 있었다.) 흰 쌀에 치즈가 들어간 따끈한 포타주라던가 커다란 새우 껍질 속 에 넣어 익힌 고기 요리라던가, 최근에는 식탁 앞에 앉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입 안에다 요리 를 집어넣고 씹는 일 같은건 전혀 내키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식탁위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맞은편에는 노아가 턱을 괸채 앉아서 이쪽을 뚫어질 것 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스푼을 들어올리고 포타주 위의 생크림을 걷어내고 있자 불쑥 녀석 이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어있는 다른 맨션을 쓰게 될거야. 여기는 돔 경계선이랑 가까워 서 아무래도 위험하거든. 중앙정부의 관사로 들어가도 좋지만 위원 회 놈들 때문에 그건 어렵고 말야. 음흉한 놈들이 건물 안에다 무슨 감시 회로를 설치해 놨는지 알 수 없으니까. 어쨌든 임관 되는대로 돔 밖의 쓰레기들부터 청소해 버릴테니까 집은 좀 더 안전한 곳으 로 옮겨야 돼. " "돔 밖을 청소한다고..? " 제대로 알아 들은건지 의아해져서 눈썹을 찌푸리자,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깊숙히 파묻은 녀석이 입가에 웃음을 떠올려 보였다. "며칠내로 신약이 중앙정부로 들어오게 될거야. 신약이 들어오면 바 로 해저돔부터 처리할 생각이니까. 내버려두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말이지. 놈들이 저항한다면 대상은 중앙정부가 있는 돔일 테고 돔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중앙 정부를 공격하는 것 보다 '지도 자'의 거주지를 찾아내는 일이 더 쉬울거라는것도 알게 되겠지. 그 러니까 며칠내로 이 곳을 떠나야 돼. " "....그렇게 되면 거래는 어떻게 되는거야. " 이 녀석은 돔 바깥의 놈들과 거래,라는걸 했다. 그래서- 거래 조건으로 지도자는 재판을 받았고 녀석의 말처럼 며 칠내로 신약이 중앙정부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내 말에 노아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것처럼 어깨를 떨면서 나직 히 웃었다. "거래,라는건 뭐야? 신약을 거래한걸 말하는거야? 신약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난 분명히 지도자를 처형시켜 줬어. 그걸로 거래는 끝이었 다구. 거래 조건에 <해저돔을 없애지 말아달라> 따위는 없었어. <돔 밖의 인간들을 보호해 달라>는 조건도 없었고 말야. 그런데 뭐 가 문제인거지? " 아무렇게나 꺼내놓은 '거래'라는 단어 하나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한번에 꿰뚫고는, 담담한 얼굴로 오히려 반문하고 있었다. 확실히- 거래 조건은 충실히 지켰다. 지도자를 처형 시키려는 이유가 돔 밖 인간들과의 거래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만(그건 거래 때문이 아니라 이 녀석 자신이 지도자 자리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래라는 것은 허울좋은 이 름일 뿐이다.) 어쨌든 나흘뒤면 지도자는 처형될테니까. 돔 밖의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지는 전혀 상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 알 바 아니다. 필요한 것을 가진뒤 쓸모없어진 상대를 아무런 망설임없이 처리해 버리는 이 녀석의 머릿속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비어있는 맨션>이라는건 무건이 새로 지은 집을 말하는건지 모른 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형 시키려는 남자가 만들어 놓은 곳으로 거 주지를 옮겨야 한다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데로 머리 굴릴 생각말고 잠자코 식사나 해. 내일이나 모레 쯤 신약이 중앙정부로 들어오는데로 집을 옮길거니까- 몸만 움직이 면 되니까 다른건 아무것도 손대지 말라구. " 부드러운 어조와는 달리 어쩐지 표정은 사나웠다. 마치 경고라도 하고 싶은 것 처럼 지긋이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 한다. '이 집의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으니 아무것도 손대지 마라'고 주 의를 주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 새벽에 네가 했던 말 같은건 전부다 잊어줄테니까 말이야. 의 사를 불러서 물어봤는데 너한테 '이인증'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어. 현실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병이라니까 혼란스러운게 당 연한건지도 몰라. 그래도 무건에 대한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자구.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해대면 그때는 정말 힘들어 질테니까 말이지. " 누가 힘들어질거라는걸까. 나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의사에게 몸을 보인건 7주전 의료센터에서- 이인증이라는 병명은 그때 튀어나온걸까. 하지만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현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병이라는건 뭘까. 머릿속이 이상해 졌다는 말일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어쩐지 기묘한 위화감이 들어서 고 개를 들자, 눈 앞의 녀석이 천천히 일어나는게 보였다. 애초에 식사는 1인분만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을 씹어 삼키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는 따위는 여전히 내키지 모양으로 이 녀석은 언젠가 자신이 말한 그대로 '먹는 행위'를 <비 생산적인- 야단스런 취미>같은 것으로 단정짓고 있는건지도 모른 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수족관 앞에서 일우도 비슷한 말을 해줬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식사를 쓸모없는 체력소모라고 말하던 남자 에 대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갈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불쑥 내 옆의 의자에 아무렇게나 기대 앉아와서 무심코 들고 있던 스푼을 떨어뜨 렸다. 내가 놓친 스푼이 납작한 포타주 그릇 위로 떨어지자 한쪽으로 뭉 개놓은 생크림이 순간, 얼굴 위로 조금 튀었다. 가볍게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생크림이 아니라 끈적하게 부푼 흰 쌀알일지도 모른다. 뺨에 달라붙은채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을 아무렇게나 손등으로 닦 아내려고 하다가 문득 가볍게 제지당했다. "이상하지. 기분나쁜 세룰리안 블루라고 생각했단 말야. 뭐랄까.. 전 혀 신임이 가지 않는 색이니까. 거짓말하는 눈이라구. " 얼굴을 닦아내려고 들어올린 손을 뼈마디가 단단하게 튀어나온 긴 손가락으로 쥐고는 진지한 얼굴로 노아가 입을 열고 있었다. "넌 그런 인간이란 말이야. 돔 밖으로 나가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살고 싶은거다. 죽고 싶다는 생각 같은건 한번도 해본적 없잖아? 돔 밖으로 나가주겠다,는건 그럴듯한 협박이었어. 그런데 말이지, 도시 안에서 이제 널 도울 사람은 나 뿐이란걸 알아야 돼. 위원회한테서 널 보호해 줄 수 있는 인간도 나 하나라구. " 노아가 잠시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얼룩이 묻어서 끈적거 리는 뺨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었다. "그러니까 나류, 거래를 하자. 무슨 짓을 해서든 죽을때까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겠어. 뭐든 원하는게 있으면 네가 원하는대로 다 들어줄게. 대신 조건이 있으니까 말이야. "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을 입가에 잠시 떠올리고는 녀석이 다시 불 쑥, 말을 잇는다. "내가 원하는건 '알'이다. 그것만 들어주면 돼." "...그런거라면 배양센터의 인간을 골라." "배양센터의 쓰레기들 대신 네가 낳는거라구. 내 말 무슨 뜻인지 몰 라? " "이상한 소리 하지마, 그런게 생길리 없잖아. " 머릿속이 조금 이상해진건 바로 이 녀석이다. 후계자를 만들어봤자 좋은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배신을 당하거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어 놓거나 발목을 잡아끄는 골치덩어리 존재로 자랄뿐이니까.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알>같은거에 집착을 하는건지 알 수 없었 다. "배양센터의 놈들도 몇 개씩이나 알이 생겼던 녀석들은 없었어. 호 르몬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몸 속에 난막이 자리잡기가 어려우니까, 의사에게 물어 봤으니까 확실하단 말야. 몇 번씩 알을 만든적이 있 기 때문에 네 경우는 난막이 생길 확률이 아주 없는건 아니라고 했 어. 더는 안바란다고 하잖아. 내 조건은 그것뿐이라구. "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경악할만한 내용 을 이야기 한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녀석을 쳐다보고 있다가 뺨에 닿아있던 손끝을 세게 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 안되는 소리를 태연하게 입을 열고 지껄이는 머릿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알이 생겨버리는 경우와, 알을 낳아달라고 <요구>하는 경우 는 조금 다른 것이다. 바로 어제, 비슷한 말을 이 녀석한테서 들었었지만 전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숙주의 몸에서 나온 알로 다시 알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도 없을뿐더러 <성장기형>으로 태어난 녀석이 만드는 알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억지로 낳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지금 네 동의를 얻으려는거다." "...알을 원하면 배양센터를 통해서 얻어. 지도자가 되면 기쁘게 알 을 낳아줄 인간은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 "그러니까... <죽어 주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게 만드는 자식이 란 말이지? 죽어도 싫단 말이지? " 다시,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뺨을 굳힌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이 어쩐지 숨이 막힐만큼 기 괴하게 느껴져서 고개을 돌리고 걸음을 옮긴 순간 곧바로 팔을 세 게 붙잡혔다. "기분 나쁘니까 긴장하지 마. 두 번다시 손대지 않겠다고 했잖아. 뭐가 불만이야? 숙주의 몸에서 나오는 알 같은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달아날만큼 싫어하지 않았냐구? 돔 밖으로 같이 나가주겠다, 고 나한테 말해줬었잖아. 그건 내 '알'을 낳아주겠다는 의미 아니었 어? " "....나는 이 집에서 나가지 않아. 네 알을 낳을 생각도 없고 네가 무 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아. "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등 뒤로 잡혀있는 팔을 풀려고 애쓰다가 결국 의자에 앉은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직 얘기 안 끝났으니까 자리에 앉아. "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 "...고집이 세군. " 팔목에 달라붙어있는 손은 크고 두껍고, 단단했다. 입술을 꾹 다문채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녀석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리곤 내가 앉아있던 의자를 발끝으로 쳐서 억지로 다시 자리에 앉게 만들었다. "얼굴이 엉망이야. 의사는 집을 옮긴뒤에 부를테니까 제대로 음식은 먹어둬. 어쨌든 식사는 해야 돼. " 녀석이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나는 여기서 안 떠나. " "내일, 수행원을 보내줄게. 여기만큼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원도 있고 조그만 수족관 같은것도 있어. 미리 가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 지. 나는 이대로 다시 나가봐야 해. 잠깐 들린 것 뿐이니까. 아까처 럼 엉뚱한 짓 하지말고 얌전히 있으라구. " 내 말같은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진지한 어조로 확인시키고 <당 분간 홀로그램 근처에는 갈 생각도 하지마>라고 다시 덧붙인다. 그리고는 여전히 팔을 붙잡힌채 입술에 키스 받았다. 물어 뜯기는듯한 키스가 아니라 조심스럽게 혀 끝으로 핥는듯한 키 스였다. 집을 옮기게 되면 나가게 되는게 훨씬 더 어려워지게 된다. ('이 곳 보다 안전한 장소'라면 틀림없이 중앙정부 근처일텐데 중앙정부가 있는 돔 중심부에 가까워 질수록 경계는 더 심해지게 되니까.) 무건이 처형되는대로 이 곳을 떠나야 하니까 그건 곤란하다. 그 전에 일우도 만나봐야 한다. <챠피>가 무슨 말을 한건지 제대로 알아봐야 하니까. 어차피 홀로그램이 입력된 프로그램은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챠피라는 아이도, 노아가 부순 홀로그램 안에서 그대로 생명이 끝나 버렸을 것이다. 일우를 통해서라면 뭐든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이 곳에서 빠져 나가는 것이 어렵다면 일우가 와줄때까지 기 다려보는 수 밖에 없다. 근신이 풀리는대로 찾아와서 뭐가 뭔지 뒤죽박죽된 상황을 이야기 해줄 것이다. 무건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의료센터 건물안에 어째서 순노부가 살아있다는건지, 무건이 죽어버린뒤에라면 찾아와도 소용 없을테지만 순노부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순노부가 정말로 살아있다면 그건 무건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또 무건이 아는 것을 일우가 모를리 없을테니까, 키스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나가봐야한다고 말했으면서 녀석은 가벼운 욕의 차림으로 침 대에 드러누웠다. (출입구 밖의 수행원들 따위 전혀 신임하지 않는 것처럼 머리맡에는 총을 놔두고 있었다.) 자는 모습만은 비슷했다. 어디가 비슷하냐고 하면 살짝 흔들어깨우면 바로 일어날것처럼 아 무런 표정없이 잔다는 점이 비슷하다. 체구도 거의 같았다. 관절부근은 푸르스름하게 혈관이 도드라져 보이고 커다란 몸은 단 단하게 근육으로 감싸여져 있다. 피부색은 노아가 조금 더 짙은 편인 것 같았다. 이 녀석도 무건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비슷한 분위기가 나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리해도 생김새와 분위기는 전혀 다를 것 같았다. 확실히 노아는 무건이 아니라 전대의 지도자를 닮은건지도 모르겠 다. 다혈질인 성격같은것도 꼭 닮아있었다. 어차피 유전형질을 그대로 이어받았을테니까 닮았다고 해도 이상하 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전대의 지도자와 다르게 병이 들어 버렸다. 극단의 선택만을, 극악한 방법으로 해치워버린다. 거기에 터럭만큼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생명을 준 부친을 살해하려고 한다. 태연하게 숙주의 몸에서 알을 얻을 생각을 한다. 그런 것 따위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져서 침대에 걸터앉은채 한숨 을 내쉬고 있었다. 내일 당장 수행원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 전에 이 곳을 어떻게 나가야할지 고민해야 했다. 출입구 밖의 인간들을 피해서 나가는건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도 사 실은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다. (노아가 잠들고 난뒤에 정원을 산책하고 싶다고 말해봤지만 그것도 안되었다.) 머리를 감싸쥔채 잠들어있는 녀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다가 그제서 야 간신히 아무런 제재없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집을 옮기기 위해서 움직여야 할 때... 내일 새로운 집으로 안내해줄 수행원이 정말로 찾아온다면, 그 때가 기회가 될지 모른다. 자의든 타의로든, 어쨌든 맨션에서 나갈 수 있게 된다. 어차피 일우가 사는 곳으로 찾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오히 려 더 잘 된건지도, 과거에도 몇 번씩이나 무건한테서 달아났던 경험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맨션에 도착하기 전에 상처가 생긴 얼굴을 핑계로 의료 센 터에 들리겠다고 수행원에게 부탁하면 노아도 아무말 하지 않을 것 이다. 아무리 해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사람이 많은 의료센터 건물안에서 무조건 달아나면 된다. 달아나는 등 뒤에다 대고 총을 쏘거나 하지는 않을테니까, 일단 센터의 지하로 내려가게 되면 일우가 사는 건물까지 연결통로 를 이용할 수 있다. (지도자가 머무르는 맨션을 제외한 도시 안의 건물들은 지하가 전 부 연결되어 있어서 이동하기가 쉽다.) 혹시 모르니까 순노부의 조그만 신발도 챙겨갖고 가자. 살아있는지 어떤지 알 수도 없는데 막연하게 그런 마음을 먹고 있 었다. 계속.. 나는 돔 안에서 직업이 없으므로 제복을 입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얌전한 디자인으로,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검은색의 옷을 골랐다. (흰색은 상위 계급의 제복 색깔이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띄게 되어서 안된다.) 상의는 소매가 길고 목 깃이 조금 올라오는 무난한 것으로, 하의 역 시 끝단이 길게 내려오는 것이다. 순노부가 신을 신발은 밑창이 부드러운 고무로 된 하얀 스니커를 골랐다. (조그맣게 프릴이 달려있는 것으로 몇 번이나 생각한 끝에 신중하게 골라낸 다음 하의의 주머니 안에 집어 넣었다. ) 위원회로부터 노아를 중앙정부로 오게 하라는 메시지를 받은건 노 아가 침대에 드러누운지 두 시간도 채 못되었을 때였다. 사실은 녀석이 눈을 감고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모습 따위 나는 처음 보는거였다. 새삼, 지금까지 잠은 제대로 자고 있었던건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노아를 깨우는 대신 거실의 소파에 걸터앉아 <정말 무능력한 보호 자다->하고 스스로를 조금 자책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자고 있었 던 것 따위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녀석이 입고 있던 욕의 대신 말끔 한 제복 차림으로 침실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장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와 허리를 깊이 숙여 소파에 앉아있던 내 목덜미에 키스하고, <내일 새 집으로 데려다줄 인간을 여기로 보낼거니까 '이상한 짓' 하지마>하고, 잠시 전까지 잠들어 있었던 기척 따위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험악한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을 해보였었다. 위원회에서 급하게 녀석을 찾은 이유가 지도자의 처형 문제 때문이 었는지, 아니면 신약 문제였는지- 노아가 말한 그대로 '전쟁,을 벌 이기 위한 준비 때문이었던 건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중앙 정부로 불려간 녀석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녀석이 '보내주겠다'고 말한 수행원이 오기 전에 서둘러 샤워를 하 고 옷을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순노부의 신발을 챙겼다. 그러니까, 챠피가 낡은 에어로카 안에서 순노부가 '신을 신지 않고 있었다'고 말해준 것이다. 돔 밖으로 나갈 때 잃어버렸을 것이다. 왜 신이 벗겨지게 된걸까,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라도 했을까, 신도 없이 모래더미 속에서 조그만 발은 어떻게 됐을까, 신은 신으면 하나가 아니라 두 쪽이 된다. 부딪히고 넘어지게 되면 조그만 발가락을 다치게 되니까, 늘 신을 신으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이 녀석은 두 짝이 되는 신발을 한꺼번 에 다 신경쓰지 못하고 가끔씩 한 짝을 정원이나 맨션의 복도에 흘 리고 다녔다. 그래도 두 쪽을 한꺼번에 잃어버리지 않는건 왼발이든 오른발이든 한 쪽 만큼은 항상 주의를 기울여서 나름대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삼켜졌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이야기 따위는 머릿속에서 이미 깨끗 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신약으로 치료되었을리 없다는 것도,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제대로 알고 있는 것 따위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것이 어딘지 머릿속을 무미건조하게 만들었다. 아기용의 침대에 걸터 앉아 주머니 안의 조그만 신을 만지작 거리 고 있는 사이에 출입구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나가자, 검은 제복 차림의 마르고 키가 큰 남자와 그 보다 좀 더 키가 작고 피부색이 어두운 남자 하나가 이 쪽을 빤히 응시 하고 있었다. "지금 출발 하시겠습니까? " 키가 큰 쪽이 어딘지 의심스럽다는 투로 묻는다. 뭔가, 싫은 일을 억지로 떠안은 것 같은 꺼림직한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싫어하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오라>는 명령을 받 았습니다. 거부하시면 명령대로 이행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만. " "노아는? " "연방 수상들과 회의 중이십니다. " "...회의라니... 벌써 중앙정부에 수상들이 도착한 겁니까? " 연방국의 수상들이 중앙정부로 모이게 되면 무건의 처형이 가능해 진다고 노아가 이야기 했었다. 그럼 무건이 처형되는건 '나흘 뒤'가 아니라 오늘이 되는건가? 아니 면 벌써 처형된건가? "아닙니다. 지도자를 재판한 일 때문에 위원회와 수상들간에 마찰이 있었는데 그걸 중재하기 위해서 WAN 시스템으로 각 국의 수상들 과 회의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상 회의같은 겁니다. "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키가 작고 피부색이 어두운 남자가 재촉하는 듯한 어조로 조금전에 들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되묻고 있 었다. "지금 바로 출발해도 좋겠습니까? "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만족한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딱딱 하게 굳어있던 얼굴 표정을 조금 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입고 있는 의복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가실 수가 없 습니다. " 그 녀석은 내가 뭔가 엄청난 거라도 이 집에서 들고 나갈거라고 생 각한걸까, 쇼핑센터를 다니면서 고심해서 산 순노부의 옷과 신발 몇 짝, 무건 이 제복을 갈아입은뒤 걸치던 욕의 한 두벌쯤은 챙겨가고 싶다고 생각 했었지만 어차피 당장은 쓸모 없는 것들인데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푸른 밤 하늘과 노란 풀밭이 펼쳐져있는 홀로그램도 가지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그건 부서져서 안되지만, 어차피 가지고 있어봤자 재생기가 없 으므로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가지고 가는건 없어요. " 불쑥 말을 내뱉자 잠시 내 얼굴을 살펴본 남자는 <그럼, 출발할까 요.>하고 애매하게 웃는 얼굴로 대꾸하고 출입구 쪽으로 빠르게 걸 음을 옮기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은색의 기체는 매끄러운 유선형으로 중앙 출입구가 조 금 낮고 실내는 길죽한 타원식으로 되어 있었다. 은백색의 딱딱한 금속 대신 바닥에는 푸른 카펫이 깔려 있었고 4개 의 좌석 역시 보통의 슬랫보다 사이즈가 좀 더 작고 안락해 보이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한 것이다. 몇 번이나 소형기를 탔었지만 카펫이 깔려 있는 따위는 한번도 본 적 없었다. 게다가 조종 장치도 따로 없다. 움직이는데 필요한 내부 시스템 대신 중앙으로 통신용의 스크린이 하나 보일 뿐이었다. 원격제어 장치나 자동 시스템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는 지극히 단순 한 구조의 슬랫이었다. (자동 시스템 만으로 움직이는 에어슬랫(air slat)이 있다는건 처음 알았다.) "중앙 컴퓨터, C구역 솔레이(soleil)-Ⅰ34 <이륙 명령>이다. "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내가 자리에 앉는걸 확인하자 스크린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니까- 자동 시스템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중앙 컴퓨터로부터 원격 주행을 받는 기체다. [C구역 솔레이-Ⅰ34 이륙명령 받았습니다. 개체인식 Ⅱ20019. 목적 지는 A구역 엥겔로스Angelos입니다. 주행시간은 38분 24초입니다.] 특유의 기계음으로 컴퓨터가 이륙을 알리자 순간 기체가 매끄럽게 수직 상승을 한다. "오늘은 예외지만 솔레이-Ⅰ34는 당신의 개체 인식(생체 인증)으로 움직입니다. 얼굴, 지문, 홍채, 성문같은 것으로 구별해 내니까 다른 인간은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원격 주행은 오늘뿐이고 자동 시스템 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후계자의 선물입니다. "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키가 조 금 더 큰 쪽으로, 가슴에는 [Ⅱ20019]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후계자의 선물>이라니 노아가 주는 선물이라는건가-하고, 혹시 돔 밖으로 나갈 때 쓸모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있는 사이에 어 딘지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로 남자가 다시 덧붙이듯이 입을 열고 있었다. "솔레이-Ⅰ34는 돔 안에서만 주행이 가능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기체가 돔 경계선 부근에 나타나거나 돔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면 정찰대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주의하세요. " 신중한 어조로 설명을 한다. 달아나려는 계획만 많았을뿐, 실제로 돔 밖으로 나갔던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어쩐지 경계하는 투로 말해와서 이상했다. 엥겔로스라고 하면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일우가 머무는 건물이나 의료센터와도 가깝다. "...노아는 아직 회의 중입니까? "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다른 쪽 의 수행원이(피부색이 어둡고 키가 좀 더 작은 쪽이다) 머리를 조 금 기울이는 듯 싶더니 곧 작게 끄덕여 보였다. "오후 내내 계속될 것 같습니다만..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 면 바로 중앙 통제실과 연결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 실은 '회의 때문에 메시지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듣고 싶었지 만 대화가 가능하다면 직접 그 녀석한테 말해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지금 연결해도 됩니까? " "잠깐만- " 문득, 키가 큰 쪽의 수행원이 눈썹을 치켜 올린채 내가 앉아있는 좌석으로 몸을 기울여 무릎위로 올려놓고 있던 팔을 세게 눌렀다. "30분 뒤면 새로운 맨션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시는게 좋겠습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 "집을 옮긴 다음 의사를 부르기로 했지만 지나는 길에 들리는 편이 훨씬 빠를테니 이대로 의료센터에 들러야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얼 굴에 상처가 생겨서 괴롭습니다만. " 입술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흉하게 부어올라서 새로운 딱지 가 생기고 있었고 광대뼈 부분에도 시커멓게 멍자국이 퍼져 있었 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샤워실의 거울로 들여다 본 얼굴은 흉측했다. "후계자께서는 다른 어떤 지시도 없었습니다. 집을 옮긴 다음 의사 를 부르기로 하셨다면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동 경로를 바꾸 는건 절대 안됩니다. " 남자가 냉담한 표정으로 내뱉고는 자세를 바로 고친뒤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씀드리면 <이동중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 언제든 바로 알 리도록>지시 받았습니다. 의료센터도, 어떤 곳도 안됩니다. 치료가 급하시다면 도착하는 즉시 의사를 불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어딘지 질린다는 얼굴이었지만 말투만은 정중했다. "그리고 후계자께서는 중요한 회의 중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 요. 사소한 일로 소란 피우는건 자제해 주셔야 합니다. " "회의중이어서 연결이 안된다면 회의가 끝난 뒤에 제가 이야기 하 겠습니다. 저는 이대로 의료 센터에 들러야 합니다. "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의사를 부르도록 하죠. " 같은 말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혹시 노아와 연결이 안된다면 상관의 지시가 없으니 좀 더 쉽게 행 로를 바꿔주지 않을까,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치료>를 위해서니까, 실수했다. 수행원이 완강하게 거절해올거라는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 앞의 남자가 까다롭게 구는건 내가, 중앙정부로 찾아가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노아에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 무기가 될 만한 거라면 수행원이 제복 안에 집어넣고 다니는 레일건 뿐이다. 분명히 제복의 가슴 쪽에 총기를 집어넣는 곳이 있었다. 플라스마 나이프 정도면 위협용으로 괜찮았을텐데(식탁용 나이프라 도 옷 속에 집어넣고 올걸 그랬다고 잠깐 후회해 봤지만 그래봐야 제대로 날도 서있지 않은 그런 따위를 수행원이 무서워할리 없는 것이다.) 무기가 될만한거라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게 없었다. 집안에는 원래부터 그런 무기를 두지 않으니까 미리 구해 놨어야 했다. 바보같은 실수를 했다고 머리를 감싸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끝까지 행로를 바꿔주지 않는다면 무기를 쥐고 협박하는 수 밖엔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의료센터까지 가지 않아도, 일우가 머무는 건물로 곧 장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자동 시스템이 아니라 중앙 컴퓨터로부터 원격주행을 받고 있기 때 문에 기체의 시스템 변경이 가능할지 잘 알 수 없지만 만약에 변경 이 안된다고 해도 중간에 내려서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면 된다. (원격 주행으로 움직이는 기체는 중앙 컴퓨터와 연결 되어있는 부 분을 파괴시키면 동력이 저절로 차단된다.) 그리고 어느 건물이든 지하는 모조리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수행원이 곁에 붙어있기 때문에 노아가 바로 알게 되겠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에어슬랫의 상측 중심부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 스크린은 얇은 유리 안으로 유기물질을 집어넣고 그 곳으로 소립자를 흐르게 해서 화면 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스크린은 부피가 크고 상당히 얇은 것이었다. 단단하고 뾰죽한 것으로 세게 내리치게 되면 그것은 의외로 쉽게 깨진다. 중앙 컴퓨터와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스크린이 파괴되면 저절 로 동력이 끊기고 중앙 컴퓨터에 기록이 남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에어슬랫의 작동도 멈춘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무의미한 언쟁은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려다 보다가 <엥겔로스는 아직인가>하는 따위의 것을 되풀이해서 묻고, <기다 리라>는 똑같이 돌아오는 수행원의 대답을 듣고 있었다. 돔을 뚫고 스며 들어오는 이상하리만큼 짙은 황갈색의 햇살 때문에 청회색의 건물들은 기묘한 연푸른빛으로 반짝여 보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길어 늘어진 건물의 그림자로 도시전체 가 어둠에 덮여있는것처럼 느껴졌다. 중앙정부가 있는 A구역쪽으로 건물이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중심 부쪽에 가까이 갈수록 건물의 밀집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외관만으로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 도시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중앙 컴퓨터, 솔레이-Ⅰ34의 원격제어 프로그램을 자동주행으로 바꾸고 싶은데 가능한가? " 창가에서 스크린 앞으로 걸어가 불쑥 말을 내뱉자, 곧 등뒤로 두명 의 수행원이 당황해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컴퓨터의 기계음이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현재 솔레이-Ⅰ34의 프로그램 변경은 불가능 합니다. 원격주행으로 A구역 엥겔로스Angelos까지 향합니다. 주행 시간은 약 12분입니 다.] 곧바로 등을 잡혀서 세게 당겨졌다. 시스템 변경은 역시 불가능하다. 그럼 동력을 끊는 수 밖엔 없다. 방법은, 중앙 컴퓨터와 연결된 '스크린'을 부수는 것이다.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거센 힘으로 등과 팔을 붙잡혀서, 뒤로 끌 려가기 전에 모니터 스크린이 뒤로 넘어가도록 힘껏 발로 걷어찼 다. 아주 오래전 수업 중에 배운 것인데 화학수업이었는지 구호 수업이 었는지는 잊었지만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러니까, 무건이 내가 배워야 할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시켜서 하 루에 몇시간 씩 수업을 받게 했기 때문에 아주 어렸을때부터 나는 공부라는걸 해왔다.)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종류라던가 사용 방법이라던가 <기기>를 다루는 방법이라던가 기기가 원격주행중일 때 동력을 강제로 차단 시키는 방법 같은 것, 내가 걷어찬 스크린은 [퍽-]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면이 조 금 휘어진채 유리에 날카롭게 금이 나갔다. 중앙 컴퓨터와 연결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금이 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부셔야 하는 것이다. [솔레이-Ⅰ34....의 프로그램 변경은 불...가능 합니다.. 원격...으로 A 구역 엥겔.... ] 확실히 이상이 생겼는지 컴퓨터는 조금전에 했던 말을 반복해서 내 보내고 있었다. 불시의 행동에, 등 뒤에 달라붙은채 잠시 굳어있던 수행원은 내 다 리가 다시 한번 스크린에 닿기 전에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 몸을 뒤 로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떨어진 다음에야 눈 앞으로 수행원 들을 볼 수 있었다. 둘 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집어던진 키가 큰 쪽의 남자는 분노로 얼굴색을 푸르스름하게 만들고서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 고 있었다. 부드러운 모의 푸른 카펫를 짚고 일어나 다시 한번 스크린 쪽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총이라도 내쏠 것처럼 내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면서 반쯤 부서진 스크린을 막고 서있는 남자에게, 수행원의 검은 제복을 힘껏 쥐고 상의의 버튼을 잡아 떼자 당황한 남자가 스크린 쪽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나 버튼이 떨어져 나간 상 의 안의 레일건을 재빨리 꺼내 들고 있었다. 미친듯이 화내던 모습같은건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감정한 얼굴로, 거짓말처럼 표정을 바꾸고 내가 조금 다가가자 재빨리 뒤로 다시 물러났다. "...잠시뒤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부탁이니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 랍니다." 레일건으로 내 다리 부분을 겨눈채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는다. 총을 뺏는것도 틀렸고 남자가 스크린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더 다 가가기도 어렵게 되었다. 스크린 쪽으로 다시 한발 걸어가자 남자가 정말 총을 쏠것처럼 흉 내를 내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쏘겠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대로 당신의 비 상식적인 행동에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할겁니다. " 말을 끝낸 남자는 그대로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시선을 이쪽으로 둔채 스크린으로 중앙 컴퓨터와 연결이 가능한지 확인해 보고 있었다. "중앙 컴퓨터! 솔레이-Ⅰ34의 스크린에 결함이 조금 생겼다. 지금 당장 복구가 가능한가? " [...... .... 솔레이-Ⅰ34의 결함이 확인되었습니다. 스크린을 확인합니 다. 솔레이-Ⅰ34의 시스템을 재인식 합니다. ] 망가진것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던 컴퓨터가 점차 원래대로 돌아 오고 있었다. 곤란하다. 다시 한번 레일건을 뺏기 위해 몸을 움직인 순간, 이상한 일이 일 어났다.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부서진 모니터 스크린의 유리 위로 푸르스름한 빛이 점등 되고 있 었는데 그것이 둔탁한 소음과 함께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에, 눈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조금 벌린 채 이 쪽을 노려본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 등 뒤를, 다음 순간 또다시 날카롭게 쇳소리가 울리고 이마에 조그맣고 까만 구멍이 뚫린 남자는 그대로 앞으로 거꾸러져 버렸다. 발치에 드러누워 꼼짝도 안하는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고개 를 돌리자 거기에는 피부색이 짙은, 주행하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머지 한명의 수행원이 조용히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당신은 상당히 위험한 행동을 하는군요. 확실히 기회는 되었습니다 만."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연 남자는 쥐고 있던 레일건을 내게 넘 겨준 뒤, 발치에 쓰러져 있던 수행원의 손에서 다시 총을 옮겨쥐고 그것을 자신의 상의 안에 집어 넣고 있었다. "후계자의 회의는 오후 늦게까지 계속 됩니다. 당신은 지금부터 저 와 함께 움직입니다. 가야할 곳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 계속.. 200세에 가까운 '적정 나이'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나를 낳아준 모 친은 어깨 밑까지 닿는 까맣고 풍성한 머리칼과 조그맣고 하얀 얼 굴을 하고 있었다. 몸이 몹시 약했기 때문에 늘 침실의 커다란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했는데, 말을 많이 하는것도 안되어서 찾아가서 괴롭히는 짓은 하 지 말라고 전대의 지도자로부터 몇 번이나 주의 받았기 때문에 가 끔 어머니가 찾고 있다고 간병인이 말해주러 오면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어머니는 어투가 몹시 느리고 행동도 기민하지 못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기 때문에 어머니를 볼 수 있는건 일 주일에 겨우 몇 번 그것도 아주 잠깐 뿐이었다. 혼자 사용하고 있던 커다란 집안이 쓸쓸했기 때문에 하루종일 정원 에 나가서 신발을 더럽히면서 놀거나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으니까)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했 다. 그런때는 잠들어 버리면 안되니까 조심해야 했다. 밤은 낮보다 훨씬 길고 무서우니까. 산소가 공급되는 <쉭익 쉭->거리는 소리는 밤이 되면 훨씬 더 노 골적으로 들렸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들려오는 사 람의 숨소리 같기도 했고 뭔가가 스물스물 기어 움직이는 소리 같 기도 했다. 밤이 되어서 자동으로 소등이 되면, 집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을만 큼 깜깜해졌다. 그러면 좀처럼 온기가 붙지 않는 침대에 누워 시트를 머리끝까지 덮고서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았다. 밤이 되면 전대의 지도자가 맨션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내 침실에서 나가면 안되었다. 처음에 한 두 번은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어머니를 찾아 갔었지만 새벽에 잠을 깬 아버지로부터 뺨을 맞게 되었기 때문에 곧 그만두 었다. 언제부터 밤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고 혼자 지내는걸 쓸쓸해 하지 않게 되었을까. [매일같이 중앙 정부에 호출당하면서 사생활을 붙잡히는 생활을 하 고 있었어도 네가 외로워할까봐 틈만나면 집으로 찾아와서 너랑 놀 아줬어. 기억안나? ] 언젠가, 맨션의 수족관 앞에서 잠든 순노부를 안고 있던 일우가 그 런 말을 해줬었다. 혼자 있는걸 무서워하지 않게 된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아무도 돌아 봐주지 않으니까 자신을 위해서 무감정한 기분이 되라고 스스로를 몰아부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소등 시간이 무서워서 자러가지 않겠다고 귀찮게 달라붙으면 잠자 코 아침까지 자신의 침실에 있게 해 주었다. 손 끝으로 다정하게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제대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외롭다,는 것과 무섭다,는 것을 같은 감정으로 혼동하고 있었기 때 문에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자 어쩐지 밤이 오는 것도 두렵지 않 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라던가 숨소리처럼 끊임없이 들 려오는, 산소가 공급되는 소리 같은걸 무서워하지 않고 견딜 수 있 게 된건 내가 두려움과 외로움에 저절로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었 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따위에 저절로 익숙해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달아날 수는 있어도 저 남자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닌데 등을 쓰다듬어 주던 다정한 손끝을 그리 워한다. 저 남자를 다시 돌려 받게 된다면, 공기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분 자같은 취급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싫어해도, 두 번다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떠날 수 있을리 없다. 그럴리 없을텐데, 시간을 역행해서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 둠속에서 필사로 귀를 막고 있던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되어 있었 다. 머리끝까지 시트를 말고 있어봐도 조그만 몸에 온기 같은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기분나쁜 숨소리와 그림자처럼 내려앉던 어둠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따위 믿을 수 없을만치 선명하게 떠올라서 두 근거리는 심장을 손끝으로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의료센터와 배양 기관은 같은 건물안에 붙어 있기 때문에 의료 센 터를 걷다보면 푸른 눈과 창백한 뺨을 가진 남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배양센터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흐릿한 생김새에 어떤 곳을 보고 있 는지 잘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복장은 늘 똑같은 연한 회색빛으로(이것도 어쩌면 제복같은 것일까) 팔과 목 부분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가벼운 상의에 하의 역시 종아리 밑부 분까지 닿는 조금 짧은 것이었다. 우스워질만큼 죄다 똑같은, 선이 약한 부드러운 얼굴 생김새를 하 고 있는건 <알>을 만들어내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일정한 기간을 두 고 늘 홀몬제를 투여받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원통 모양의 의료센터의 내부를 U자 형태로 구부러져 움직 이는 무빙워크에 서서 마치 세포분열이라도 한것처럼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푸른 눈의 남자들을 어딘지 수족관 속의 복제된 물고기라도 보는 기분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좀 더 인간들이 많이 다닐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센터안은 조용 했다. (이런곳에서 수행원들로부터 무턱대고 달아나기란 사실은 거의 불 가능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총을 건네준 남자는(얌전히 받아든뒤 내 상의 안의 주머니 속 에 넣어 두었다.)무슨 이유에서인지 고장난 에어슬랫에서 내린뒤 곧 장 의료센터로 왔다. 무슨 일인지, 도와주고는 있지만 이유를 알 수 없고 왜 이 곳까지 나를 오게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게 총을 건네준 남자는 사실은 수행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원회에서 보낸 인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사 실이라면 물론 좋은 의미에서 이 남자를 보냈을리는 없었다.) 위원 회에서 보낸 남자가 노아의 수행원을 죽이고 내게 총을 건네줬을리 없는 것이다. 누구의 수행원이든 어떤 인간이든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따위, 내 주위에 있을리 없을텐데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건물의 최상층은 센터의 넓고 화려한 내관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따로 분리된 것처럼 보였다. 병실도 아니고 생긴 모양이 어쩐지 평범한 '공용 주택'처럼 보인다. 번쩍거리는 은색의 철제로 된 복도의 양쪽 벽면으로는 일정한 간격 으로 떨어져 있는 출입구가 붙어 있었고 수많은 출입구마다 아래쪽 에 작은 <이름표>들이 걸려 있었다. 푸르스름한 인공조명이 흘러 들어오는 복도를 성큼성큼 걷다가 문 득 걸음을 멈춘 수행원은 뒤쳐진채 멍하니 서있던 내 쪽을 뒤돌아 보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조금 기울여 보였다. "이 쪽으로 오세요. 다 왔으니까요. " 피부색이 어둡고 보통의 수행원들보다 키가 조금 작은듯한 남자는, (하지만 체구는 상당히 다부져서 어깨가 넓고 목이 굵었다. ) 에어 슬랫에서 내린뒤 의료센터의 무빙워크를 통해 최상층으로 올라오는 줄곧 어딘지 긴장하고 있었던 것처럼 얼굴표정을 부드럽게 누그러 뜨리고 있었다. "혹시, 당신은 <지도자>를 살리고 싶은겁니까? " 수행원 복장을 한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 었다. "그래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한거라면 말입니다, 어쩐지 안심이 됩 니다만. "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가. 의아한 기분으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는 순간 짧은 기계음과 함께 내가 서있던 앞쪽의 출입구가 열리고 수행원의 손에 의해서 그 안쪽으로 자연스럽게 떠밀려지게 되었다. 한걸음 안으로 들여놓게 되자 출입구는 내 등 뒤에서 부드럽게 닫 혔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지도자를 살리고 싶은건가> 지도자라고 하면 무건을 말하는 것이다. 무건을 살리고 싶은건가, <그렇다면 안심이 된다-> 무건의 수행원들은 이미 법에 의해서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전대의 지도자가 죽게되면 다음대의 지도자를 위해서 전대의 지도 자를 수행하던 인간들은 모두 처형이 되었다.) 저 남자는 누구일까. 왜 저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걸까. "야아, 나류, 오랜만이다- " 순간, 시야를 모조리 가릴만큼 커다란 덩치가 바로 옆에서 튀어나 와서 숨이 막힐만큼 세게 끌어 안는 바람에 놀랐다. 코 끝을 마비시켜 놓을 만큼 강렬한 동양난 냄새를 풍기는 반 나체 의 남자가 뺨에 몇 번이나 키스를 퍼부은 뒤 간신히 몸을 껴안고 있던 팔을 풀고, 기쁜 듯이 이쪽을 내려다 본다. 어째서 지금 다른 건물에 있어야 할 남자가 의료센터의 최상층, 어 딘지도 알 수 없는 방 안에 나체로 나타나 얼굴을 보이고 서 있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기랄, 너 얼굴이 왜 이래? " 막 샤워를 끝낸 모양으로 아직 물기가 안 마른 머리칼을 곤란한 일 이 생겼을때의 습관처럼 마구잡이로 흐트리면서 남자가 문득 눈썹 을 찌푸려 보였다. "무슨 행동을 어떤 식으로 하면 얼굴이 너처럼 되는거냐? " "여기서 뭘 하고 있는겁니까? " 도무지 현실에 맞지 않는 일만 계속해서 생겨나서, 뭔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틀내내 감금 당하느라 죽는줄 알았단 말야.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 아, 그보다 얼굴말고 다른 다친데 있으면 내놔 봐. 입고 있는걸 죄다 벗겨놓고 살펴보고 싶지만 난 아주 오래 오래 살다가 좋은 꼴 로 죽고 싶으니까 말이지, " 요란스런 말투로 떠들고는 내 뺨을 붙잡아 찬찬히 살펴본다. "....말이지 그냥 해보는 소리지만, 설마 무건이 어떻게 됐다는 얘기 같은걸 듣고 자해를 했다거나?" 잠자코 있는 사이에 일우가 불쑥 엉뚱한 소리를 했다. "뭐,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그 자식한테는 그렇게 설명하기로 하 고, 나한테는 제대로 설명해 보라구. 아무리 봐도 자해가 실패로 끝 난 얼굴은 아니잖아, 이건?"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요. " "아아, 그럴려고 널 이 곳까지 불러들인거니까. 아무리해도 기회가 오지 않아서 슬슬 조급해 지려던 참이었거든. 말이지, 사실은 나류 네 도움이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어찌됐든 재난중이니까 말이야. " 가벼운 말투였지만 장난스러운 표정은 깨끗하게 지운채 입가만 슬 쩍 잡아올린 일우가 어딘지 만들어 붙인 것 같은 웃음을 내보이고 있었다. 계속.. 생각보다 꽤 넓은 집안은 둥그스름한 타원형의 거실과 몇 개의 방 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거실 중앙으로 작은 유리 테이블과 길죽한 모양의 딱딱해 보이는 의자가 하나 놓여져 있을뿐으로 아무것도 없 이 상당히 단조로워 보이는 곳이었다. 카펫이 없는 철재 바닥은 깨끗하게 잘 닦여져 있었지만 어딘지 모 르게 집안 전체는 지나치게 건조해 보였다.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유리창도 없다. (얼마전 병원에서 나온뒤 잠 깐 머무른 적이 있는, 정부기관에 딸려있던 본관보다 훨씬 더 극악 한 곳이다.) 굳이 카펫을 깔지 않아도 되는, 비칠것처럼 투명한 유백색의 부드 러운 바닥 대신 걸을때마다 기분나쁜 마찰음이 나는 철재로 된 바 닥에, 벽도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여유로움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살벌한 공간이었다. "..최상층은 의사들이 머무는 곳이야. 다른건 몰라도 산소나 물은 넉 넉하게 쓸 수 있으니까 말야. 어차피 쓰지 않는 곳이니까 아무렇게 나 내버려 둔 것 같아. " 거실 중앙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던게 이상해 보였던건지 조 금전 옷을 갈아입으러 욕실로 사라졌던 녀석이 아직 채우지 않은 상의의 단추를 목깃까지 반듯하게 올리면서 설명조로 말하고, 거실 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상당히 크고 체골도 큰 남자다. 실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오래전 에 헤어졌었던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엄청난 일이 있었다. 지금 저 남자와 함께 '이 곳'에 서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진지함이라고는 터럭만큼도 느껴지지않는 남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 고 있다. 나한테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녀석이지만(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 이번만큼은 도와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건의 일이니까, 내가 알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뭐든 해줄 것이다. 우선 뭐부터 물어 봐야할지- 무건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이틀전에 있었던 재판을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혹은 처형을 면하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순노부에 관한 것도, 어째서 무건이 순노부를 죽게 내버려뒀는지, 무슨 생각으로 구하러 가주지 않았는지. 어쩌면 지금 녀석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살아있는 녀석을 어째서 죽었다고 거짓말 했는지에 대한 것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들까지 전부 좋을대로 생각하려고 든다. 순노부가 살아있을거라고 믿고 조그만 신발까지 주머니에 넣어 가 지고 왔다.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현실에서 있을리 없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 이틀 뒤면 무건이 처형 당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처형 방법인 '슬라임'으로 되살아난 인간은 이제껏 한명도 없다는 것도, 이미 결정 난 재판을 없던 것으로 하는 따위 사실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고장난 홀로그램이 만들어낸 거짓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믿고 있다 는 것도.. 이대로 무건의 처형일까지 태평하게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린다고 해봤자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 게다가 나는 서둘러 돔을 나가야 한다는 것도. 사실은, 모조리 다 이미 알고 있는데도. "조금전의 수행원은 누구였습니까? " 일우가 침실이라고 말해준 방안은 거실과 다를바 없이 살풍경하기 짝이 없었다. 푸르스름한 은색의 철제로 된 바닥은 여전히 발을 디딜때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고 한쪽으로는 시트가 반듯하게 정리된, 다 리가 높은 커다란 침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래도 거실은 앉을만한 곳이 없으니까 하는 수 없었다. "솔레이 안에서 왜 소동을 부렸어? " 조금 늦어진다고 생각했더니 샤워실 안에서 옷만 갈아입은게 아닌 모양이었다.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다시피해서 침대 끝에 앉게 한 녀석이 대답 대신, 오는 도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것처럼 물어 온다. 어쩐지 처음 보는 이상한 표정으로 건네다 봐서 의아한 기분이 들 었다. "널 여기까지 데려온 수행원은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자야. 계기판 구실을 하는 스크린을 부셔서 그러니까... 달아나려고 했던거야? 도 대체 어디로? " "당신을 만나볼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 "나를? " 일우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찡그려 보였다. "무건을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 "무건을 돕고 싶어? " 이번에야말로 전혀 뜻밖이라는 얼굴을 한다. "이건.. 놀라 자빠지겠구만. " "지도자를 살리고 싶은가 물었어요. 그렇다면 안심이 된다고까지 말 했어. 그 사람은 누굽니까? " "'노아'가 데리고 있는 놈이 아니라 교육센터에 있던 수행원이니까. 이름표를 조회했으면 금방 탄로났을텐데, 새로 임관된 놈들은 확실 히 일이 서툴단 말야. 무슨 일이든 '만일의 경우,라는게 있으니까 사람이든 뭐든 대처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두는거야. 네가 만난 수행원은 무건이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도구>였어. 꽤 쓸만했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설명을 한다. 나를 여기까지 안내한 남자는 위원회에서 보낸 인간도 아니었지만 노아에게 붙여진 수행원도 아니었다. 교육센터는 임관을 기다리거나 임관되지 못한 수행원들이 머무는 곳이다. 누구의 수행원도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충성심'따위도 없다. 누가 되든 <지도자>가 되는 인간을 위해 사전 교육을 받는것 뿐이 니까. 오래전이라면 도대체 언제부터라는걸까. 무건은 어째서 교육센터에 있는 수행원들의 도움까지 필요할 거라 고 생각했던걸까. "나류.. 무건이 순노부를 죽게 했다고 생각해? " 고개를 숙이고 있는사이, 내 앞의 철제바닥으로 다리를 구부리고 앉은 일우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저 자식이 원망스러워? " 중앙정부의 지도자였지만, 지금은 유폐된 인간. 기계처럼 무감정한 얼굴을 한 주제에 놀랄만큼 따스한 손을 가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남자. 무건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나열해 본다. 무건이 순노부를 죽게 했다고 생각하는건가, 저 남자를 아직도 원망하는건가, 무건은 실제로 순노부를 죽였다. 하지만 순노부와 마찬가지로 죽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얼굴을 볼 수 없게 될까봐 두렵다. 원망하지 않는다. "아닙니다. "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자 잠시 생각에 잠긴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던 녀석이,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 아직 젖은채인 머리칼을 버릇처럼 쓸어 올리면서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나류. 이 집은 의료센터의 최상층이고 의사들이 머무는 곳이야. 그 러니까, 외부인의 출입이 까다롭게 통제되고 있는 곳이지. 의사의 도움이 아니라면 드나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라는거다. 이 방의 주인은 무건의 주치의이기도 하지만 내 <형>이기도 하니까. 너와는 사촌 사이가 되는 남자야. " 무건의 주치의라면 <닥터 한>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봐왔던 남자로(전대의 지도자가 살아있었을 때 부 터 무건의 주치의를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얇은 은을 덧씌워 놓은 것처럼 보이는 비정상적으로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보다, 닥터 한이 사촌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다. "뭐, 나랑 얼굴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건 일단 제쳐두고 말이지, 어 쨌든 <사촌>이라는 이유로 귀찮을만큼 어울려주는 경우는 없단 말 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무건은 곤란할 정도로 질투가 심해. 맨션에 상주해 있는 수행원은 한번에 일주일을 넘기고 있지 않았고 너와 사사롭게 대화를 하는 것도 금지 당해 있었어. 그런데도 나는 10년 이상이나 널 봐줬어. 그건 무건이 그렇게 해주길 원했기 때문 이야. 곤란해질만큼 강요를 받긴 했지만, 그거야 나도 약점이 있었 으니까. 뭐, 그런것치곤 그동안 나도 꽤나 열심히 어울려 줬었지? " 차가운 손이 가볍게 내 뺨을 쥐었다가 놓는다. 바로 얼마전까지 맨션으로 찾아와서 아무렇게나 내 무릎에 드러 눕 거나 우스게 소리를 해대던 남자였는데 어쩐지 지금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바보처럼 귀여워하던 아이까지 내버릴 정도로 사랑받고 있는대도 너는 아무런 자각이 없어. 도대체 왜일까. " 알 수 없는 말이 한숨처럼 내밀어진다. "실은, 나는 지금 여유가 없어. 널 여기로 부른건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야. 꽤 고민했었지만 이제 생각하고 자시고 할 시 간이 없으니까. 말했다시피 지금은 재난 중이고 나는 무슨 짓을 하 든 무건을 살려내야 하거든. 그 자식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건지 너무 빤히 보여서 화가 나. 나류, 너는 무건을 원망할 수도 없고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 넌 자격이 없으니까. " 가엾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내뱉아지는 말은 용서없는 것이었다. "어째서 돔 밖의 인간들이 순노부를 데리고 갔을까. 놈들은 이미 신 약을 손에 넣었어. 어떤 조건을 요구했다고 해도 중앙정부는 절대 로 거절하지 못했을거야.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건 놈들이 요구하던게 새로운 돔이나 산소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신약은 그저 중앙정부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보호막 같은거였으니까. 그 러니까 완전히 다른 것, 빌어먹을 왕족의 후계자를 몇백년이나 되 물려준 <모체>를 같은 혈족인 지도자의 손으로 벌하게 하는 것이 놈들의 목적이었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돔 밖의 놈들이 거래 조 건으로 알려온건 바로 너야. 나류. 지도자인 무건이 후계자를 낳은 너를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 하는 것. 그것으로 자신들의 요구 는 전부라고 말해왔어. 그게 거래 조건이었다구. " 바로 어제 눈 앞에서 봤던, 홀로그램으로 된 세계가 작은 유리조각 으로 점멸해서 사라지던 장면이 그대로 다시 반복되어서, 끊임없이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목이 아프고 세게 쥐고 있던 손끝이 주체할 수 없을만치 떨 리고 있었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미친 듯이. "순노부가 있는 곳의 위치는 알아낼 수 있었지만 정찰대를 보낼 수 는 없었어. 순노부는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되 있었고 신약은 해저 깊숙히 놈들이 만들어놓은 돔에 있었거든. 해저돔을 해치우려면 대 규모의 군병과 무기가 필요했고 그렇게 하려면 위원회의 동의가 있 어야 했는데 위원회는 절대로 허가해 주지 않았으니까 말이지. " 그 날 밤, 잠든 사이에 맨션으로 돌아온 무건은 '협상이 깨졌다'고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녀석은 이미 죽었다고. 돔 밖의 모래위에 세워져 있던 지저분한 구형 에어로카 안을 저 남 자는 무슨 기분으로 보고 있었던걸까. 바이러스로 죽어가는 아이를 어떤 기분으로 보고 있었을까. 왜 그 때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중앙 컴퓨터의 정보를 지우면서까지 숨겼을까. "거기다 녀석은 엉뚱한 일까지 벌리기 시작했어. 위원회가 알게되면 재판 없이 그대로 처형장으로 쳐넣어졌을 일을 말야. 무건이 저렇 게 된건 노아가 원인이 아니야. 노아는 제 아버지에게 이용당한 것 뿐이니까. 누구의 탓도 아니지. 나류, 무건은 엄청난 일을 벌렸어. 언제고 알려지게 될 일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쓴거야. 그 일이 알려 지게 되면 너도 같이 위험해질테니까. 노아가 너한테 집착하는걸 그 질투심 많은 새끼가 계속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구. <노아>가 지도자가 되면 너도 안전할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순노부가 죽 고 난 뒤 위원회에서 몇 번이나 네 이야기가 나왔어. 이대로라면 확실히 위험하긴 하지. 무건은 한가지 밖에 생각 못하는 놈이야. 내 가 널 데리고 무슨 말을 지껄인건지 그 새끼가 알게 된다면 무슨 짓을 해올까... 말이지. 넌 무건이 어떤 놈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저 미친 자식이 이 곳에서 뭘 만들어 냈는지 보여줄테니까 일어나 보라구. " 계속.. 짧고 검은 머리카락은 내가 어릴때부터 봐오던 것이다. 작은 금장식이 달려있는 흰 제복도-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는것처럼 보이는 얼굴도, 온통 하얗게 비치는 방안은 벽의 일부분이 투명한 유리막으로 뚫려 있어서, 두 개의 방이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유리막 앞에 서서, 두 팔로 상체를 의지한채 무건은 오랫동안 건너 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곳에는 조그만 아이가 털뭉치처럼 웅크린채 잠들어 있었다. 한참을 그림자처럼 서있던 남자가 문득 작게 숨을 들이킨다. 유리막 안에 비쳐보이는 조그만 아이가 잠결에 몸을 꼬물거리고 있 는게 보였다. 그것을 유심히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은 어쩐지 너무나 기괴했다. 저런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다. 얼어붙을 것 처럼 서늘한 표정인데도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눈은 너무나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보여서, 뭔가 기분이 이상 했다. 왜 저런 눈을 하고 있는걸까. 왜 일우는 이런 영상을 보여주는건가. 투명한 스크린 안으로 보이는 무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철재로 만들어진 최상층의 방안은 의료실로 곧바로 통하는 리프트 가 있어서 그것으로 움직인 곳은 지하 4층의 <실험실>이었다. 온도는 극히 낮았고 복잡한 기계장치가 있는 둥그스름한 구조의 입 구에서부터 시작해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긴 행렬로 몇 개씩이나 갈래 갈래 나누어져 있는 복도는 출입구와 벽, 천장과 바닥을 구분 해 내기 힘들만큼 온통 하얗게 비쳐보이는 색이어서, 눈이 아플 정 도였다. 단단한 고무수액이 서로 마찰되는것같은 기분나쁜 질감의 바닥대신 매끄러운 유백색의 바닥에 벽도 천장도 같은 재질로 되어 있어서 흡사 안쪽의 내용물이 비칠것처럼 투명해 보인다. (마치, 젖빛의 물 컹거리는 젤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곳은 그냥 실험실이 아니라 도시 내에서 폐기처분된 인간의 일부를 돔 밖으로 내보내는 대신 의학 연구의 재료로 쓰는 <생체 실험실>인 것 같다. 구조는 얼핏 일반 병동과 비슷해 보이지만 의사나 환자, 지나다니 는 행인조차 없이 미세하게 회전하는듯한 기계음 소리가 규칙적으 로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니까, 공기중에 섞여 들어오는 바이러스나 세균을 감지해내는 장치였다.) 두 개의 방이 서로 연결된 형태의, 의료기기가 복잡하게 얽힌 방으 로 안내한 일우가 출입구를 열자마자 보여준 것은 투명한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는 무건이었다. "이 곳은 통제를 위해서 항상 스크린으로 감시되고 있어. 외부인의 출입은 절대로 안되니까 말야. 무균실안에다 배양물을 집어넣고 기 르고 있는 꼴이라구. 유리막 너머로는 이쪽이 보이지 않아. 저 자식 은 단 한번도 저 안으로 들어간적 없었어. " 저건 무건이 재판을 받기 전의 영상이다. 저 때가 언제 였을까.. 이런 곳에서 저 남자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재생되고 있던 스크린을 점멸시킨 남자가 말 한다. "뭐, 조금 괴로워져 보라고 보여준거지만 너한테는 아무런 의미 없 는 영상이겠지? 어차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테니까 말야. 난 말이 지, 귀여워하던 놈과 위원회의 관심을 끌고있는 후계자 중에 하나 를 고르라고 한다면 좀 더 이익이 되는 쪽을 골라. 연방국을 책임 지고 있는 신분을 가진 이상, 하는 수 없으니까. 쓸모없는 감정으로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진 않을거라는 얘기다. -무건은 멍청한 짓을 했어. " 일우가 쓰게 웃으면서 내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류, 고백하자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너를 돌볼 이유가 없어. 네가 잘못되지만 않으면 저 자식도 괜찮을거라고 생각했었거든. 설마 전 부 내팽게치고 끝낼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그 이유가 바로 네가 될거라는것도 말이야. " 단조롭게 이어지는 말은 부드러웠지만 단호한 것이었다. "어차피 무건이 너한테 돌려주려고 했던거니까 계획대로 <그건> 돌려주겠어. 이대로는 오래 방치하지도 못하니까. 무슨 낌새를 느꼈 는지 실은 몇시간 전에 정보부로 수색 명령이 떨어졌단 말야. 중앙 돔 전체를 대상으로 5세 이하의 아이를 찾고있어. 얼굴 생김새까지 조회되었으니까 이제 찾아내는건 시간 문제겠지. 그러니까...무건은 이 문제로 언젠가는 재판에 회부되었을거야. 시기와 죄목은 달라졌 겠지만. 문제는 너도 연관이 되어 있다는거다. 만약 무건이 처벌 받 지 않았더라면, 네가 위험해졌을 테니까. " ".......그거라니.. 뭘 말하는겁니까. " 시기와 죄목은 뭐고, 내가 연관이 되어있다는 말은 또 뭘까. 5세 이하의 아이는 왜 찾고 있다는걸까, "체세포를 핵이식한뒤 인공적으로 외모와 성격이 같은 또다른 인간 을 만들어 내는 일은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로 상하위 신분에 관계없 이 처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당신은 실험물의 기주寄主가 되기 때 문에 원래 대로였다면 아마 처벌을 면하기가 어려웠겠지요. " 기계음과도 닮은 쇳소리가 섞인 이상한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렸는 데, 돌아본 곳에는 푸른 제복 차림의 <닥터 한>이 어딘지 긴장한 기색으로 서있었다. 가장 최근에 본건 두 번째 알이 생겼을 때, 이 곳은 의료센터에다 저 남자는 여기서 일하는 의사였고 게다가 외부인을 센터의 통제구역에까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존재이기도 했지만, 일반 병동이 아닌 지하의 <생체 실험실>에 서, 그것도 이름이 나오자마자 곧장 얼굴을 보게 될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얼굴이 마주치자 닥터 한은 뭔가 곤란한 일이 생각났을때의 버릇처 럼 눈가를 찡그리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곳은 생체 실험실로 쓰이는 병동이지만 의사들의 왕래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이 곳으로 정해졌던 겁니다. 가장 눈이 안미치는 곳 이니까요. 원래는 이런 곳이 아니라 좀 더 시간이 흐른뒤 <맨션> 으로 보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만... 역시 안좋을 때지요. 지금은. " 점점 이상한 말들이 튀어 나오고 있었다. '맨션'이라면 어디를 말하는걸까. 보내지게 되어 있었다,니 그건 무슨 뜻일까. 문득, 그제서야 무건이 허리를 낮춘채 유리막을 통해 보고 있던 <방안>이 생각났다. 고개를 돌리자, 넓은 방 한쪽으로 한 쪽면의 절반 정도를 유리막으 로 해놓은 곳이 보였다. 그러니까 조금전에 스크린으로 봤던 무건이 서있던 곳이다. 무심코 다가가 안을 들여다 보고, 그 안의 희안한 광경에 나도 모 르게 입가에 손을 댄다. 도무지 있을리 없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조그만 침대가 있다. 그리고 방안을 가로질러 넓게 깔려있는 두꺼운 카펫. 그 위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조그만 덧신 두짝. 그것은 늘 보던 푸른색의 덧신이었다. 순노부의 것이다. 카펫 위에 멍하니 앉아서, 순노부는 입체 재생기가 보여주는 그림 에 몰두해 있었다. 까만 머리칼은 제대로 빗어주지 않아서 제멋대로 삐쳐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앞쪽에 뭔가 거무스름한 것이 들러붙어서 더러웠다. 게다가 덧신은 아무렇게나 내팽겨쳐둔채 신발은 한짝만 신고 있었 다. 나머지 한짝은 도무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 저것은 맨션에 있는 순노부의 방이다. 복잡한 기계장치들이 들어찬 이 쪽과 완벽하게 괴리된 도무지 알 수 없는 공간. 마치 순식간에 공간을 워프해서, 몇 개월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 다. 나른한 오후의 흐린 햇살이 비쳐드는 집안에서, 브라우니를 달라고 조르던 순노부를 걱정하던 때로, 바다에 살고있는 멸종된 돌고래와 물고기에 대해서 떠들던 때로, 어쩌면 이것도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 '영상'인걸까. 아니면 정말로 나는 도무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공간으로 흘러 들어가 버린걸까. 멍하니 눈 앞의 광경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입체 재생기의 영상 에 손을 집어 넣고 달콤해 보이는 푸딩을 잡으려고 애쓰던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이 쪽을 빤히 쳐다봤다. 무건의 미니어처같이 보이는 작고 둥근 얼굴.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의 피가 저 밑까지 스윽 가라앉는 것 같은 기 분이 든다. 가까이서 기계음 소리가 들리고, 곧 유리막을 통해 닥터 한이 출입 구를 열고 방안으로 걸어 들어가는게 보였다. 남자가 바닥에 놓여져 있던 조그만 재생기의 영상을 끄고 아이의 손을 잡아 이끌자 겁에 질린 얼굴로 얌전하게 굴던 녀석이 갑자기 끌려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바둥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훌쩍훌쩍 울기까지해서, 곤란한 얼굴이 된 닥터 한이 이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저게 뭐냔 말이야..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 "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린 말에, 바로 옆에서 일우의 대답이 돌아 온다. "아아, 제정신으로 저런걸 만들어낼 수 있을리 없다고 나도 생각하 고 있으니까, 그렇게 느껴도 하는 수 없지. 나류- 이틀 뒤면 무건은 처형이 돼. 지금 수상들을 앉혀놓고 떠들어대고 있는 놈이 일을 잘 해결할 것 같으니까 말야, 넌 괜찮아. 위원회 놈들이 알아챈다고 해 도 하나뿐인 후계자가 너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한은 이걸 구실 로 삼아서 무건을 재판했듯이 널 어떻게 할 수는 없을테니까. '자 질'이 문제시 되어서 폐위된 놈이라구. 클론을 만들어 냈다는게 알 려지게 되면 그때는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해졌을거야. 손 끝으로 다 룰수 있는 후계자가 있는 한 이미 몇 번이나 위원회의 경고를 무시 해온 '지도자'는 아무런 힘이 없고, 또 위원회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떤 기회를 잡아서든 널 처리하려고 했을테니까 무건은 가 장 너한테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한 셈이야. 어쨌든 이틀 안에 지도 자의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서 연방국 수상들이 중앙돔으로 모두 모 이게 될거다. 입회는 위원회 놈들과 수상들, 의사와 사형 집행인만 이 가능할테고 말야. 무건을 되살려 내느냐 죽게 하느냐 하는건 그 때 달려있어. 너한테 달려있단 말야" 내 옆으로 허리를 구부린채 무심한 얼굴로 서서 유리막 안을 내려 다 보는 남자를 멍하니 쳐다본다.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전혀 처음보는 생소한 이질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 새끼양처럼 폴짝거리던 순노부를 귀여워해주던, 내 무릎에 아무렇 게나 기대 누워서 정보부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해주고 조그만 홀로그램 재생기로 연인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장난스럽게 웃고있던 남자가 지금 눈 앞에 서있는 이 남자가 맞는건가, 조금전 센터의 최상층에서 만난 남자와 이 남자가 같은 인간이라는 걸까. 아니, 이 녀석이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남자와 정말로 동일인이 맞는건가. "외모나 수명, 느끼는 감정이나 성격에서 기억까지 그대로 전이된 복제 인간은 드물뿐더러 만들어 내기도 불가능해. 나는 의학 같은 건 관심도 없고 아무런 지식도 없지만 말야, 적어도 몇십명이 넘는 의사가 달라붙어서 <저걸>완성해 냈다는건 알고 있으니까. 무건은 완전히 저기에 미쳐 있었어. 애초에 '신약'이 있었다면 좋았을거야. 전쟁을 해서라도 신약을 구해낼 수 있었으면 좋았어. 그랬으면 아 마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겠지. 너는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 할 수 있어. 무건의 원래 계획대로 이대로 아이를 데리고 노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거다. 그리고 적정나이가 끝날때까지 네가 원 하는대로 살아. " 다시 방 안의 출입구가 열리고, 닥터 한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나 오는 아이가 보였다. 희고 통통한 뺨은 울어서 온통 젖은채로 콧물까지 흘리면서 끅,끅,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뭡니까.....? "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건을 되살려 낼거야. 요행히 처형장에 서 살아나올 수 있다고 해도 외부로 나가 평생을 숨어 살아야 겠지 만. 그거야말로 지독한 형벌일테지만 말야, 그러니까 무건을 제대로 살리는 방법은 <후계자>를 죽여 없애는 일 뿐이란 말이야. 후계자 가 사라지게 되면 지도자를 처형시키려는 일은 불가능해지니까. 지 도자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위원회를 역으로 없애는 일도 불가능 하겠지만, 위원회는 수상들이 만들어낸 놈들이기 때문에 위원회를 해산시키는건 연방국의 수상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것과 같으니 까. 어쨌든 후계자가 사라지게 되면 위원회는 재판을 없던 것으로 하는 수 밖에 없어. 지금 무건이 살아남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그 외는 아무런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노아'를 처리할 수 있는건 너 밖 에 없어. 나류, " 조그만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이쪽으로 끌려오고 있는 아이를 내려 다 본다. 의사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바둥거리다가 겨우 손이 풀리자 무서 워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신이 끌려나왔던 출입구가 닫 혀있기 때문에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걸 확인하 고는 울면서 의사의 다리 뒤쪽으로 달아났다. "친해져 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이상할만큼 겁이 많군요. " 간신히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닥터 한이 하는 수 없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문득, <챠피>의 말이 떠올랐다. 순노부가 늘 울고 있다,고 말해줬다. 지하에 있는 홀로그램 안에서. 지하는 맞지만 이 곳은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챠피는 어떻게 이 곳을 알고 있었을까. 어떻게 이 곳으로 흘러 들어왔던걸까. 홀로그램이 아닌 곳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간뒤 어깨를 움츠린채 이제는 소리내 엉엉 울고있 는 녀석을 찾아내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꼭 끌어안아 본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곤두선 머리카락에서는 달짝지근한, 어딘지 그리운 향이 났다. "순노부. " 느끼는 감정과 <기억>을 그대로 옮겨낸 복제인간이라는건 도대체 어떤걸 말하는걸까. 어떤 존재라는걸까. "순노부.. " 나를 기억해 낼 수는 없다고 해도 어쩌면 희미하게 감정은 남아있 을지 모른다. 그 감정은 괴롭고 두려운 것 뿐일 것이다, 춥고 더러운 곳에 내버려진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생겨난 생명이라 면. 한참만에, 뭔가 물컹한 것이 얼굴에 닿는다. 조그만 손이 내 눈가를 가로막고 있었다. 물기가 잔뜩 묻은 지저분한 얼굴로 녀석이 가만히 나를 올려다 본다. 울음은 겨우 그쳐서, 간간히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어쩐지 달라붙을 것 처럼 매달려와서, 안아 올려주자 응석 부리듯 이 내 목덜미에다 젖은 코끝을 묻어왔다. 두려울만큼 행복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내게 과분하다. 그런건 '죄,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소용없었다. 기쁘다. 다시는 놓고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꿈이어도 상관없다고 느낀다. <홀로그램>이라고 해도, 아무런 상관없었다. 무건을 되살려 내는 방법이 그런 것뿐이라면 하는 수 없다고 생각 한다. 그런데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잠시만 아무 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고통도, 괴로움도, 기뻐서 부서질 것 같은 마음도, 아무런 감정없이 이대로 눈을 감은채 현실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달콤한 일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계속> 꼭 감은 눈가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어서, 조그만 코에도 뭔가 너저분한 것이 붙어 있는게 보였기 때문에 잠든 순노부를 데리고 그냥 원래의 맨션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달아나고 싶어서 안달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어느 곳 보다 그리웠다. 두 번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쩐지 마음 이 애틋해진다. 마음이 불안정할 때 그리운 곳을 찾게 되는건 어쩔 수 없는 습성같 은건지도 모르겠다. 일우의 도움으로 낮에 의료센터까지 안내해준 수행원과 함께 이번 에는 부서진 솔레이 대신 륀에 올라서 맨션에 도착했다. (에어슬랫은 신종이든 구종이든 두가지 종류로 다시 나뉘어 지게 되는데 솔레이soleil와 륀lune으로 구분 되었다. 그러니까, 륀은 중하 위 계급의 인간들이 소유하게 되고 솔레이는 상위계급의 인간들이 가지게 되었다.) 이미 경비병들이 깨끗이 사라진 맨션은 저녁 무렵의, 보랏빛으로 가라앉은 햇살 때문에 반구형의 건물 전체가 온통 붉으스름한 색으 로 비쳐보였다. 밑으로 떨어뜨릴것 같은 녀석을 한번 추슬러 안고 맨션의 길다란 복도를 지나 아무도 지키지 않는 중앙 출입구를 연뒤, 멸균실 안으 로 들어갔다. 깊이 잠든 녀석은 옷을 갈아 입히느라 한참을 귀찮게 했는데도 눈 썹을 고집스럽게 찌푸렸을뿐, 일어나지 않았다. 말끔하게 된 녀석을 아직 붉은 자연광이 스며들어오는 거실의 소파 로 데리고 가서 부드러운 시트를 뭉쳐놓은 무릎 위에다 조심스럽게 눕힌다.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이건 순노부가 아니다. 기억이 그대로 전이됐을뿐인, 순노부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클론'이다. 잠든 녀석을 내려다 보면서 묻는다. '네 원래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는건지' '너는 순노부와 얼마나 많은 기억을 나눠 가졌는지'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탓에 붉게 된 뺨을 꼼 질거리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었다. 둥글납짝한 이마를, 조그맣고 귀여운 모양의 코를, 지친것처럼 조금 벌리고 있는 엷게 혈색이 도는 입술을, 미안하다,거나 나는 몰랐다거나 하는 말 따위로 용서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겉모양을 본뜬 클론의 손을 꼭 잡고 중앙 출입구를 열고 나가던 죽은 순노부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잠든 내 팔에 보드라운 뺨을 기대며 졸던 모습도, 입가에 푸딩과 젤리를 잔뜩 묻히고 멍하니 내 얼굴을 올려다 보던 모습도. 어쩌면 좋을까. 너는 왜 내게 손을 내밀었을까. 왜 나를 밀어내지 않았을까. 닥터 한은 이 녀석이 순노부의 가장 최근의 '기억'까지 모조리 가지 고 있다고 했다. 무건이 의사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조금의 남김도 없이, 모두 다 그대로 복원시키도록, 그렇게 해서 생겨난 아이는 자신의 이름 조차도 기억해 내지 못했 다. 하지만, 틀림없이 감정의 편린은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돔 밖에서 혼자 병들어 죽게 했다는 자책감이 있다. 장기 대신 검고 끈적거리는 기분나쁜 액체가 뱃속에 온통 가득차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쁘다. 심장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뛰고 있었고 지친 몸이 뭔가에 다정 하게 감싸이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마치,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다 '악몽'같은거니까 이제는 아무런 문 제 없다고, 신이 내 곁에서 안심하라고 작게 속삭이는 것 같은 기 분이 든다. 하지만... 느릿느릿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으로 잠든 순노부의 이마를 뺨으로 누르면서, 나도 모르게 소리내서 반문해 보고 있었다. "너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걸까... " 맨션으로 돌아오기 전, '닥터 한'으로부터 순노부의 <유전자 정보> 가 들어있는 홀로그램 칩을 전해 받았다. 거실에 앉아서, 그것을 재생기에 넣고 조사해 본다. 나는 순노부의 유전자 정보를 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무건으로부터 하관이 약하다는 주의를 들었었기 때문에 뭐든 딱딱한걸 입안에 집어넣고 깨무는 버릇이 있는 순노부가 걱정 스러웠지만,(씹는건 좋지만 딱딱한건 안된다고 들었으니까) 그건 열 등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인간한테나 해당되는 것으로, 순노부와 똑같은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있는 저 녀석은 꽤 단단한 '결합조직' 을 가지고 있었다. 돔 안에서 살고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면역력이 약 하다는 결점을 빼면 아무런 이상없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 인격이상이 될 징후 역시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유전질환 없이 1미터 90센티가 넘는 성인이 될 것이고, 적 정 나이가 끝날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나한테서 아이를 기르게 한다,는 무건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 잘못된 생각의 결과물이다. 순노부가 나와 꼭 닮은 클론에 의해 돔 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바이러스에 감염 되었다. 무건은 순노부의 유전자 정보와 체조직을 이용해서 순노부와 기억 을 똑같이 공유한 클론을 만들어냈다. (돔 밖의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유인원의 뇌수준에 생명력도 극히 짧은 일반적인 클론과는 다른 것이다) 죽은 순노부를 되살려 놓은 남자는, 마무리로 혼자 처벌 받는쪽을 택했다. 노아를 죽여 없애겠다,는 무건의 말은 위협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런 방법 밖에 없었을 테니까. 어찌됐든 위원회 놈들에게 '지도자,라는건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이 다. 후계자가 사라지게 되면 지도자를 처형시키려는 계획은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일우가 해준 말은 전부 옳았다. '지도자의 자질'이 문제가 되어서 위원회로부터 강제 소환까지 명령 받았는데, 연방국에서 금지하고 있는 클론을 만들어 냈다는게 알려 지게 된다면 그때의 상황이라는건 머리를 써서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틀림없이 그것을 이유로 위원회는 무건을 없애려고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법으로 만들어진 클론의 기주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돔 밖의 인간들과의 협상에서 걸림돌이 된 나 역시 같이 처형되었을 것이다. 무건은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위원회가 알고 있는 유일한 후계자를 '처리'하는 것으로 지도자의 자리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처형일을 조금 앞당겨 내 생명 이라는 것을 위원회라는- 좀 더 탄탄한 끈을 쥐고 있는 후계자에게 넘길 것인가. (이미 처형된 지도자의 범법행위는 더 이상 깊이 조사하지 않고 적 당한 선에서 묻어두는걸 원칙으로 하니까) 아니, 사실은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위원회로부터 '강제소환'을 명령받은 상태였다. 저 남자한테는 '후계자'를 죽이는 것밖에 다른 방법 같은건 없었을 것이다. [살리고 싶어? ] 마지막으로 봤던 때, 무건은 내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노아를 살리고 싶은가, 하고. 무슨 의미로 건넨 말이었는지, 며칠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깨 닫는다. 그러니까- 정말로 어리석은건 바로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하얀 타르타르 소스가 묻은 구운 생선을 순노부의 입안에다 넣어주 자 녀석은 깜짝 놀라서 입 안에 든걸 도로 뱉아냈다. 순노부의 치아는 약하지 않았고, 어차피 '먹는다,는 행위는 몸안의 생체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지만 습관처럼 요리를 조합해 내서, 그것을 녀석한테 가져다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순노부는 여전히 무서워하는 눈으로 걱정스럽게 주 위를 둘러보다가, 거실 한쪽에 앉아서 홀로그램 재생기를 들여다 보고 있던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갓난아기처럼 매달려서 떨어지려 고 하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눈으로 뚫어질것처럼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뭔가 안심 한 듯이 조그맣게 숨을 내뱉고는 내 옷을 꼭 쥐는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라고 말해주자, 화가 나는 것 처럼 딱 달라붙어서 떼를 썼다. 이 녀석의 뇌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어떤 기억이 들어 있는걸까, 새로운 환경을 겁내하고 혼자 남겨지는걸 두려워하는 모양이, 돔 밖에서 혼자 고통스러워 했을 모습과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혼자 있는걸 싫어하면서도, 가까이 오는 인간들을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내게 손을 내밀고 응석을 부려온다. 어쩌면, 이 녀석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자신을 돔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죽게 만든 클론의 얼굴로가 아니라, (그렇다면 무서워하면서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을테니까) 나 쁜 기억은 모조리 지운채 항상 자신의 곁에 있던 '보호자'로서의 내 얼굴만 기억하고 있는건지도. "순노부, 그건 먹어도 괜찮은거야. " "...그치만 말랑거려. " 식탁 앞에서 무심코 꺼낸 말에, 제대로 된 단어를 가지고 녀석이 쬐그맣게 대답을 해와서 놀랐다. 잠자코 쳐다보자, 양 손으로 입을 꼭 막은채 내 얼굴을 지긋이 올 려다 본다. "....말랑거리는건 싫어? " "나는 단단한게 좋아, 말랑거리는건 싫어. "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접시를 불만스럽게 한번 내려다 보다가 눈 썹을 찡그리면서 또다시 <피칸이 잔뜩 들어간 과자가 좋아. 치즈가 발라진 것>하고 제대로 설명을 해온다. 의료센터에 있을 때, 누군가 치즈,라던가 피칸이 들어간 과자라던가 하는걸 먹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순노부는 소스보다 치즈를 바른 요리를 좋아한다. 말랑거리는건 싫어하고, 딱딱한걸 입안에 넣고 깨무는걸 좋아한다. 그런걸 알고 있는 사람이 순노부가 좋아하는 먹을 것을 일부러 손 에 쥐어준건지도. 하지만, 센터에서 누가 그런 행동을 한걸까. 일부러 뭔가를 먹이지 않더라도 하관의 뼈가 저절로 약해지거나 치 열이 나빠지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다는걸 유전자 정보를 들여다 본 인간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텐데. 이 녀석이 좋아하는걸 빤히 알고 있는 인간이라면 무건이나 일우밖 에 없을테지만 몇시간 전에 봤던 일우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어쩐지 그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마치 검은 유리알처럼 무감정한 눈으로 훌쩍거리는 순노부를 잠자 코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우가 평소와 다르게 뭔가 질책하는 말투를 쓴다던가 무서울만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건 지금 녀석이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는 법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런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고 순노부의 유전자 정보가 들어있던 홀로그램 칩을 건네면 서 닥터 한이 말했다. (이 남자는, 무건의 부탁으로 일우가 사촌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접 점이 없는 인간의 친구 노릇을 꽤 성실하게 해주고 있었다는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스가 묻은 구운 생선 대신 크림 치즈를 바른 비스킷을 가져와서 다시 조그만 입에다 넣어주고는 (이번에는 내뱉지 않고 얌전히 먹 었다) 하얀 레이스가 덮힌 식탁위로 뺨을 기댄채 엎드려서, 손가락 을 지저분하게 더럽히면서 비스킷을 먹고 있는 순노부를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순노부, 바다에 사는 물고기말인데... " 내가 불쑥 말을 꺼내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상한 모양 으로 눈썹을 조금 찌푸려 보인다. "그러니까, 네 말이 맞았어. 바다가 더러워졌기 때문에 네 수족관으 로 온거야. 원래는 바다속에서 살지만.. 그렇다고 수족관에서 사는 놈들이 <가짜>는 아니야. 이 세상에 가짜 같은건 없어. " "가짜? " "가짜란건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은걸 말하는거잖아? 사실 이 아닌걸 거짓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리 없단 말이야. 있다고 해도 그런게 눈에 보일리 없어.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도, 바다에 살았던 물고기처럼 진짜가 맞을거야. 분명히. " '실체,라는 것은 생각만큼 의미가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대답해 주지 못한 순노부의 질문에 대한 답을 문득 떠올리 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눈 앞에 있다. 같은 모습으로, 같은 눈짓과 표정과 말투로, 그렇다면 그건 거짓이 아닐 것이다. 식탁 위에 엎드린채 순노부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닦아주면서 그렇게 설명하자, 녀석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문득 조그만 손 으로 자신의 눈을 비볐다. "졸려? " 하고 묻자, 곧 <응>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잠들때까지도 녀석은 침대 한쪽에 걸터앉은 내 무릎께에 고집스럽 게 달라붙어 있었다. 입술을 조금 벌린채 고른 숨소리를 내는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 보 다가 따스한 시트를 가져와서 목 부근까지 잘 덮어주었다. 맨션 부근과 중앙 출입구를 지키던 수행원들은 이미 한명도 남아있 지 않았다. 무건의 처형이 끝나는대로 중앙정부는 '해저돔'을 없앨 생각을 하고 있다. 연방정부의 후계자가 신약을 손에 넣은뒤에 무슨 짓을 해올지, 하 는 따위 이미 돔 밖으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무기를 모으고 연방 정부 중 하나와 거래까지 해 왔으니까 놈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보복같은 것으로, 다시 한번 지도자의 거주지인 이 곳으로 돔 밖의 놈들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이번에는 지도자가 아니라 후계자가 되는 인간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른다. 돔 밖 놈들의 연방정부에 대한 증오심은 끔찍한 것이고, 유리돔을 만들어낸 '지도자'에 대한 미움은 다섯 살 밖에 안되는 그 아이까지 잔인하게 해칠 정도니까. 당장 일어날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지만 어딘지 뭉그러진 마음 한쪽은 고장난 것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터질 것 처럼 뛰던 심장도 복잡하게 엉켜있던 머릿속도, 전부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상할 정도였다. 순노부가 잠이 들고 난 뒤, 닥터 한을 통해서 일우와 메시지 연결 을 했다. 낮에 봤을때보다 좀 더 위화감이 느껴지는 웃는 얼굴로 일우는 의 아해 하는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안색이 안좋군. 맨션으로 되돌아 갔다던데 후계자는 아직인건가?] "당신이 말한대로 하겠습니다. "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말에, 녀석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순노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위원회가 순노부의 클론을 해치지 못 하도록 당신이 도와준다면, 말입니다. " [그런건 내가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후계자가 사라지고 무건 이 돌아오게 되면 일은 간단하게 해결되니까 걱정마라. '클론'이든 뭐건 위원회 놈들은 숨소리 하나 제대로 못낼 테니까 말이야. ] "만약에 무건이 순노부를 방치한다면 말입니다. 그때는 당신이 양육 해 주세요. " [그건 무슨 소리야? ] "부탁드립니다. " [어이- 간떨리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구. 나더러 뭘 키우라는거 야? ] 당혹한 얼굴로 녀석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이 왜 배양센터로 찾아가지 않는지 왜 가족을 만들지 않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어요. 10년 이상이나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던 남자의 아이라면 키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내 말에 스크린 속의 남자가 문득 입을 다문다. "대신 당신이 무건과 어떤 연애관계를 가지든 상관하지 않겠습니 다." 일우가 센터에서 말한 '약점'이라는건 그런 것이다. 정작 필요할 때는 아무런 쓸모없는 남자였다. 무건이 말하는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지도자,의 부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건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내 친구 같은 것이 되주었던 거다. [무슨 헛소릴 하는거야, 나한테 하반신이 고장나 있는 인간을 마음 대로 갖다 붙이지마. 벌써 예전에 정리된 놈이니까. 경고 하는데 말 이지, 마음대로 네 목숨을 갖고 장난칠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찾아 가서 널 내 손으로 죽여주고 말겠어. ] "일은 잘 끝낼테니까요. 그러니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하는 말 입니다. " [자책하고 있는거라면 그만둬. 센터에서는 내가 말이 심했으니까.] "신경쓰고 있지 않으니까 그만두세요. " [무건이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클론을 만들어 냈는지 한번 잘 생각해 봐.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아이가 죽는걸 지켜본 놈이다- 좋 게 미련이나 일말의 양심 따위로 책임을 다한거라고 말해주고 싶지 만 그런건 되살려 내봐야 자기 손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여 주는 '표식'밖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야, 괴롭기만 할 뿐이지. 이미 지나간 일을 법을 어기면서까지 되돌리려는 짓 따위 지도자로서 이 미 실격이다. 그런 짓을 도대체 왜 했다고 생각해, 말해 보라구. 네 가 죽으라고 명령한다면 저 미친 자식은 아무런 의심없이 총구를 제 머리에 갖다대고 쏠거야. 그것만 알아 둬. 분하지만 내가 말한건 전부 사실이니까 말야. ] 지친것처럼 나직하게 말을 내뱉는 남자를 스크린에서 점멸시키고, 거실의 소파로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걸터 앉았다. 갈아입지 않은 옷은 그대로, 상의에는 수행원이 준 레일건이 있었 다. 어째서 총을 건네준건가 생각해 보고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쥔 다. 그러니까, 원래대로 하려는 것 뿐이다. 모두다 원래 자리로 되돌아 가도록, 엉망진창이 된 일을 처음으로 되짚어 꼬인 매듭을 푼다. 사라지는 인간도 남는 인간도 모두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 노아가 신약을 구한다는 조건으로 지도자,를 내놓지 않았더라면 어 떻게 됐을까. 그래도 어차피 무건은 재판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범법 행위를 했으니까. 그때는 나도 같이 처형 되었을테고.. 아니, 그게 아니다. 사실은 중앙정부가 지도자를 재판하는 일따위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무건이 재판을 받았던건 위원회의 신임을 잃었기 때문이다. 후계자가 신약을 거래하면서 지도자의 목숨을 돔 밖의 놈들에게 주 었기 때문이다. 무건이 처음 클론을 만들어 냈을 무렵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전 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알이 성장기형의 돌연변이 형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순식 간에 성인이 되어서,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게 할 줄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계속> 천장의 조명을 줄였기 때문에 침실은 짙은 남색으로 비쳐 보였다. 조그만 아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에 팔을 베고 가로 누워서 푸르스 름하게 발광發光하고 있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 보다가 천천히 일 어나 앉는다. 잠을 잔것도 아닌데, 뭔가 복잡한 꿈이라도 꾼것처럼 머리가 울려 서, 주먹 쥔 손으로 미간을 누르고 있었다. 어쩐지 목이 아프고 입안이 까칠한 느낌이 난다. 낮에 센터에서 얼굴의 멍을 가라앉히기 위해 조제받은 주사 탓인지 도 모른다. 찢어진 입가의 상처도 대충 치료 받았다. 비현실적인 부유감이 들어서 잠시 두 눈을 감고 있다가 한숨을 내 쉬고, 침대에서 다리를 내려 거실의 커다란 창가로 걸어갔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한쪽면이 투명하게 뚫려있는 창으로 집안의 풍 경이 역으로 반사되어 검게 눈에 들어온다. 머릿속으로는 태평하게도, 따스한 햇살과 붉고 푸른 구름이 부드럽 게 깔려있는 넓은 풀밭의 홀로그램을 떠올리고 있었다. 매끄럽게 목으로 감기는 바람과 까만 흙이 맨발에 닿는 간질간질한 감촉이라던가.. 천천히 풀밭을 걸으며 노곤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저녁 무렵의 하늘 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회갈색이 섞인 기분나쁜 보랏빛이 아니라 붉고 노란 색이 층층히 뒤섞인 옅은 보랏색의 부드러운 구름이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새기고 머릿속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눈 으로 멍하니 쫓는다. 달짝지근한 향을 품은 미지근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따스한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햇살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자- 부드러운 색조로 눈 앞을 가득 채우던 풍경은 희미하게 흩어지고 대신 귀신같은 형상의 남자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노려보고 있는게 보였다. 어깨가 넓고 키가 큰 녀석이다. 희게 떠오른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채 이상한 안광을 내는 눈동자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뭔가 친숙한 느낌의 생김새라고 생각하다가 전대의 지도자의 얼굴 을 떠올리고는 수긍을 한다. 확실히 이 녀석은 그 사람을 많이 닮았다. "뭐하고 있는거야? " 달콤하게 코끝을 간질이던 바람이 멎었다. 춤추듯이 쏟아져 내리던 노란 햇살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매끌매끌한 거실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어쩐지 싫을만큼 생소하게 맨발에 달라붙고 있었다. "여기서 뭘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어. "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낮고 위협적인 것이었다. 멍하니 쳐다보자, 날이 선것처럼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던 노아 가 문득 눈썹을 찌푸린다. "의사에게 얼굴을 보였나? " "....낮에 센터에 들렀어. " 녀석의 뒤로 수행원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회의가 끝난건가? " 내 말에 녀석이 굳은 얼굴을 조금 풀고, 지친 듯이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아아. 지긋지긋한 놈들 때문에.... 그보다, 너 때문에 괜한 헛걸음을 했어. 곁에 잘 붙어 있으라고 주의까지 줬는데 행적도 제대로 모르 다니 무능한 수행원 놈들 같으니. 그 쪽으로 도착 시간이 체크되어 있었으니까 당연히 집 안 어딘가에 있을거라고 생각했겠지, 하나같 이 쓸모없는 놈들이야. 돌아가는대로 내 손으로 처형시켜 버릴테니 까. " 그러니까- 낮에 자신의 수행원 하나가 죽고 그 수행원을 죽인 인간 은 자신이 보낸 인물이 아니라 교육센터에서 나온(무건이 데리고 있던) 수행원이었다는걸 이 녀석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집을 옮기라고 말했을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군. 중간에 멋대로 내려서 의료센터에 들려도 좋다고 말한적 없어. 한가롭게 그런 곳에 들리라고 에어슬랫을 보낸게 아 니란 말이야. " ".......... " "......내일, 신약이 중앙정부로 들어오게 돼. 그러면 지도자의 처형이 끝나는대로 해저돔은 폭파 될거야. 돔 밖의 지저분한 변종들 같은 건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 말했지만, 집을 옮기려는건 그때 를 대비하기 위해서야. 해저돔을 없앤다고 돔 밖의 인간들이 전부 사라지게 되는게 아니니까. 정말 위험해 지는건 전쟁이 끝난 후다. 그래서 돔 경계선 부근에 있는 이 곳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거라구." 초조해 하는 빛으로, 검은 눈동자가 빤히 이쪽을 노려본다. "게다가 이 집은 일분 일초라도 머물기 싫단 말야. 정말이지 구역질 이 날것 같아. 너는 여기서 저 빌어먹을 자식이라도 떠올리고 있나 본데 네 목숨을 붙어 있게 하는건 어디까지나 나라는걸 잊지 마. " "중앙정부에서 왜 어린 아이를 찾고 있다는거지? " 내 말에 노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려 보였 다. "무슨 소리야? "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아이>를 왜 찾고 있느냐고 묻고 있 는거다." 한숨처럼 말이 내밀어진다. 중앙정부에서 5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찾고 있다- 연방국, 그것도 중앙정부가 있는 돔안에서 '복제인간'이 만들어진 일 따위 바이오미메틱스(biomimetics)를 이용한 생체 탐지 센서를 통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5세 이하의 어린아이>라는 세부적인 사항이 붙 어 있는 것이다. 중앙돔 안에 살아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어쩌면 <복제인간>이라는 형태로. 그러니까-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걸 짐작할 만한 인간은 이 녀석 밖에 없으니까. [챠피]가 이야기한 내용을 모조리 듣고, 중앙정부에 확인을 요청했 을 것이다. "중앙 정부에서 어린아이를 찾고있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해준거지, 응? 컴퓨터로 그런게 탐색 될리 없고 수행원 따위는 알리 없으니.. 아아... 그렇지. 잘난 정보부에 있는 네 사촌 놈이 말해준건가? 연락 을 막아놨었으니, 그러니까- 낮에 의료센터에 들렀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군. 잘도 달아났다 했더니 숨어있던 곳이 <의료센터>였나? 자, 네 사촌놈이 또 뭐라고 지껄였지? 들은대로 말해봐. " 녀석이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음산하게 웃어보인다. "이미 돔 밖으로 사라진 아이를 왜 찾고 있는거냐? 도대체 어쩔셈 이야. " "확인을 했을 뿐이야. 돔 안에 벌레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따위 생 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니까 말야. " "......벌레라고? " "그럼 뭐지? 실체가 없는 생명체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나쁜건가? 허가받지 않은 생명이 돔 안에서 나온다면 당연히 죽여 없앤다. 그 게 연방국의 규칙이 아니던가? <중앙정부>는 당연히, 의심스러운 부분을 조사하고 있을 뿐이야. " ".......이제 제발 그만해. 위원회 놈들한테 이용 당하는건 그만둬. 생 체반응을 없애고 유리관 속에 가둬두는걸로 전부 끝나버려. 그 속 에서 살아날 가능성이라는건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야. 일단 생체조직을 괴사 시켜놓으면 살아날 가능성 따위 누구도 장담 못 해. " "그래서? " "요행히 살아 나온다고 해도 적정나이가 끝날때까지 돔 밖을 헤매 다니지 않으면 안 돼. 죽이고 싶어서 안달난 놈들이 득실대는 곳에 서 말이야. 그런데서 몇시간이나 살 수 있을까, 응? 도대체 왜 그렇 게 죽이고 싶어하는거야, 생명을 준 인간을 살해해서 네가 얻어내 는 것 따위, 너한테 무슨 가치가 있다는거냐? 무건은 안 돼. 끔찍한 죄를 짓는 것이 돼. " "웃기지마!!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 곧바로 주먹이 날아와서,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부서 진 것은 얼굴 바로 옆에 붙어있던 유리창으로, <쾅>하는 무시무시 한 굉음과 함께 우지직-하고 유리에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나한테는 시간이 얼마 없어. 한번만 더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그때는 곧장 네 놈 머리부터 으깨주겠어. 그 머릿속을 내가 모조리 들어내 주겠다구. 알아듣겠어? " 붉게 물든것처럼 보이는 눈이, 똑바로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바로 코끝에서 낮게 속삭이는 음성으로 이야기 해온다. 어쩐지 머리를 감싸쥐고 싶은 기분으로 가만히 녀석의 얼굴을 붙잡 고 입술을 열었다. "할 수 있을런지 잘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대로 <알>을 낳아주겠 어. 네가 바라는대로, 뭐든 들어 줄테니까. 중앙돔에는 네가 모르는 적들이 있단 말이야, 절대로 너한테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구. 지도 자 자리를 위임 받지 않겠다고 내일, 위원회에 전해. 돔 밖으로 나 가지 않아도 살 수 있어. 연방국들 중에 조용한 곳이 있으면 그 곳 으로 가서 같이 사는거다. 무건이 절대 널 해치지 못하도록 할게. 누구도 네 몸에 손끝하나 대지 못하도록 할테니까, 약속해. " 찌르는 듯한 붉은 시선으로 내 얼굴을 노려보고 있던 노아가 갑자 기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큭큭,하고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주체할 수 없을만치 커져서, 녀석은 도무지 못견디겠다 는 듯이 바로 옆의 긴 소파에 쓰러지듯이 기대 앉았다. "나는 꿈같은건 꾸지 않는단 말이야. " 간신히 웃음소리가 멈춘 것은, 머리를 아래로 떨군채 어깨를 떨던 녀석이 불쑥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붙잡았을 때로, 아직 갈아입지 않고 있던 검은 상의의 폭이 좁은 소매 위로, 푸르게 힘줄이 솟아 난 뼈마디가 굵고 큼직한 손이 꽉 달라붙어 있었다.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해서 내가 원하는대로의 현실을 만들어낼 뿐 이지. 무건이 돌아오면 어찌됐든 나는 죽어. 뭐- 그 따위는 아무 상 관없어. 지금 당장 숨이 끊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유전자를 가 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남자는 죽여놓고 갈거 야. 무슨 생각으로 제 무덤안까지 기어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아 무래도 좋아. " "....정말로 죽이고 싶을만큼 싫다는건가? " "말했잖아, 원하는걸 현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나는 최선을 선택 을 한다고. " 마치 달아나려는 것을 제지하듯이 팔목을 단단하게 얽어매고 있는 굵고 긴 손가락을, 잠자코 내려다 본다. 부서진 유리의 미세한 조각들이 달라붙은채 가늘게 생채기가 생긴 손등으로 점차 붉으스름하게 피가 맺히는 것이 보였다. 과격하고 흉포하다. 무슨 행동을 해올지 알 수 없다. 적이라면 쏘아 죽이면 된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문제라는 것들은 가장 처음의 꼬인 부분을 잘 라내면 되는 거니까. 무건을 죽이려고 하는 인간은 그의 유전자를 그대로 달고 나온 아 이고, 그 아이는 나를 기주로 해서 태어났다. 부친을 죽이려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태어난 아이는 다시 나를 통해서 자신의 알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러니까, 지도자를 처형시키려는 이유가 단지 그런것뿐이라면, -만약에 내가 사라지게 된다면 이 녀석은 어떻게 될까. 그래도 자신에게 유전자를 준 인간을 죽이려고 들까. 내가 지금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 총을 꺼내든 뒤에 녀석을 쏘게 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댓가로, 나도 같이 죽어준다면 그것으로 싫은 일은 전부다 끝나게 되지 않을까. 아니, 틀렸다. 나는 노아를 죽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 녀석이 자신에게 유전자를 준 인간을 해치게 하고 싶지 도 않다. 무건을 죽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째서 아이를 죽이려고까지 하면서 무건을 살리고 싶어하는 걸까. 내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건은 털 끝 하나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도무지, 어째서 이런 마음이 드는건지 알 수 없었다. 잡혀있던 팔이 부드럽게 끌어 당겨져서 나도 모르게 앉아있던 노아 의 무릎께를 짚게 되었다. 고개를 들자, 어딘지 상처 받은 것 처럼 보이는 두 눈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붉게 열이 스며들어있는 눈은, 화가 난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릎 위로 온 몸을 짖누르고 있는데도, 떠밀어 내려는 기색조차 없 었다. 대신 마치 연인에게 하듯이 천천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지고 뺨을 쓰다듬었다. "싫어해도 하는 수 없어. 너는 선택의 여지 같은게 없으니까 말야. 연방국 어딘가로 도망가서 살아주겠다고 결심할만큼 저 빌어먹을 자식을 살리고 싶다는건가? 네가 무슨 힘이 있지? 벌레처럼 들러붙 어서 겨우 생명을 유지해가고 있는 주제에 말이야. " 상의의 깃을 벌리고 드러난 가슴께에 입술을 대면서, 녀석이 비난 하듯이 말해왔다. 허리 부근의 맨살로 뜨거운 손바닥이 상의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 다. 몸의 윤곽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듯이 등을 쓰다듬고, 완전히 드러 난 가슴의 점을 손끝으로 만진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이에 입술에 키스 받았다. 물컹거리면서 들어온 혀로 입안을 아플만큼 세게 빨린다. 머릿속이 마비된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대로 섹스까지 가게 되버려도, 그래서 뱃속에 다시 <알>이 생기 게 되어도 좋다. 그것으로 이 녀석이 내 말을 믿어준다면, 어쩌면 무건의 처형일전 에 알이 생기게 된다면- 혹은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원하는 녀석이니까 그걸로 처형을 미루게 할 수 있을지도, 아니면 중앙정부를 떠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할 수도 있지 않 을까. 노아가 중앙정부를 떠나겠다고 말하면 위원회도 어쩔 수 없을 것이 다. 후계자는 말그대로 후계자일 뿐, 지도자가 아직 살아있는 이상 연 방국의 지도자 자리를 지켜야 할 의무 같은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원회도 강제로 노아를 잡아 가둘 수 없다.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으로 재판을 받게 한 지도자를 살려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텐데. 어차피 노아는 이 곳을 떠나지 않을테고, 나는 그런 녀석을 죽일 수 없으니까. 알, 같은 것이 또다시 생길 리가 없을텐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떠 올린다.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절실히 무건을 되살려 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계속..> "나류... " 조그맣게 들리는 목소리에 잠시 의아해졌다. 자박자박하고 발자국 찍히는 소리와 함께 소파 쿠션에 대고있던 머 리카락이 간질거리면서 작게 당겨진다. 몸 위를 짖누르고 있던 차가운 맨살이, 마치 굳어진 것 처럼 조용 해져서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극심하게 싫은 뭔가를 발견해낸 것 처 럼 노아가 험악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입을 벌린채 도무지 눈 앞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떼지 못한다. 그제서야 옆에 서있는 조그만 것이 뭔지 깨달았다. 이건 순노부다. 의학 기술로 되살려낸 것. 내가 연한 노랑색의 꽃그림이 그려진 푸른색의 유아용 옷을 입혀준 녀석이다. 손을 내밀어서 희게 부어있는 통통한 뺨을 만져주자 응석부리듯이 조그만 팔을 내밀어서 목을 꼭 감아왔다. "나류, 더워. " 달라붙은채 칭얼거리는 말투로 떼를 쓴다. "더워? " "응. 그리고 또, 또.. 발이 간지러워.... " 다시 생각난것처럼 불쑥 고개를 들고 말하고, 거실 바닥에 쪼그리 고 앉아 고개를 기울인채 잠시 생각해 보다가 갑자기 조그만 한쪽 발을 내게 보였다. 신중하게 들여다봤지만 아무것도 안보여서, <괜찮아>하고 중얼거리 자,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번에는 반대쪽 발을 보였다. 그러자 빨갛게 두드러기가 돋아난 것이 보였다. 저녁에 씻었을때도 괜찮았는데 도대체 이게 뭘까 하고 걱정이 되었 다. 의료센터의 생체 실험실은 인체에 별 해가 없는 미세한 바이러스까 지 감지해 내서 멸균시킨다. 이 녀석은 그런곳에서 태어난 것이다. 어쩌면 집안의 미세한 먼지 때문에 생겨난 염증같은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잠시 발을 내려다 보다가 혀끝으로 침을 발라주자 조그맣게 <아파>하고 항의해왔다. 뭔가, 조금 이상하다. 그게 뭘까 하고 생각해 보다가 겨우 깨달았다. 내 이름이 불렸다.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익숙한 듯이 내 이름을 부른 것이다. 그것이 의아해서 물끄러미 쳐다보자 어쩐지 불안해하는 눈초리로 순노부가 다시 내 팔에 꼭 매달렸다. "분명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서 죽었다고 들었어. 스크린을 통해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었단 말야. " 소파에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킨 노아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 지르 고 있었다. "분명히 죽었다구!! 이게 뭐야? 설마 정말로 되살려 놓은건가? 저 미친 자식이.... " 그러니까 위원회에 알려 중앙돔 안으로 어린아이를 찾아보게 한건 단순히 <확인>을 위한 것뿐이었던걸까, 이 녀석은 정말로 몰랐던 것이다. "그렇군...... 나를 속인거였어!! "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나직하게 말을 내뱉는다. 조그만 녀석이 겁을 집어먹고 내 팔에 달라붙다시피 해서는, 커다 란 눈으로 노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상한 생물체라도 보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눈 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데도, 녀석은 울거나 달아나는 대신 겁 먹은 눈으로 노아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끈덕지게 팔에 달라붙 어 오는 순노부를 떼어놓고, 소파 아래로 떨어져있던 검은 상의를 집어들어서 팔에 꿴 다음 대충 단추를 잠갔다. "벌레를 키우고 있었어. 지금까지, 저 빌어먹을 개자식이.. " "정보부가 A구역 전역을 뒤지고 있다고 해서 감시가 없는 이 곳으 로 데리고 온거야. 이 곳까지 생체 탐지 센서가 작동하진 않을테니 니까. " "벌레를 키우고 있었다구!! 나를 속였어! 어쩐지 순순히 재판을 받 는다고 생각했었어. 저런걸 만들어 놓고 있었던거야, " "속인게 아냐, 어차피 선택 해야 했어. 무건은 자신을 희생하는 쪽 을 선택했어. 위협같은게 아니었어. 정말로 무건은 널 죽일 생각이 었던거야. " 깨끗하게 단추를 잠근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면서 간신히 목소 리를 낸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그 새끼한테 고마워하라는건가? 살려줬으니 감사하라고? 나를 이용해 먹은 저 빌어먹을 자식한테? " "이용한게 아니라구. " "그럼 뭐야!! 나를 지도자로 만든 다음에.. 그래서 널 나한테 준 거 였어. 내가 지도자가 되면 위원회가 널 어쩌지 못할거라는걸 이용 한거야, 나는 널 죽일 수 없고 너는 저 자식이 되살려 놓은 <실험 물>을 목숨을 걸고 소중하게 여길테니까, 지도자로서 자신은 아무 런 힘이 안남아 있으니까 날 이용해 먹은거야!! 저 빌어먹을 개자식 이...!" 소파가 크게 출렁거렸다. 몇 번이고 주먹으로 소파 위를 내리치더니 내가 다친 손을 붙잡자, 거칠게 내 팔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처형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내가 지금 당장 가서 죽여놓겠어!! " "그런게 아니야! 말했잖아, 단순히 너를 위협했던게 아니란 말이야, 무건은 저 때 분명히 총으로 널 쏘려고 했었어, 하지만 안했어, " "그래서 어쩌라고? 저 자식이 날 쏘지 않은건 내가 필요했기 때문 이야, 클론을 만들어 내는건 중죄란 말이야, 아무런 힘도 못쓰는 지 도자 따위 한순간에 퇴위 시켜버릴 수도 있어. 날 바보취급 하지마! 저 교활한 개자식!!! " 제복 상의의 단추가 전부 풀어져서 맨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데도 전혀 신경쓰는 기색없이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러 출입구를 연 다.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출입구 바깥 쪽으로 저녁 무렵까지 도 없었던, 이 녀석이 데리고 온 검은 제복 차림의 수행원들이 보 였다. 생각보다 꽤 많은 숫자였다. 노아는 정말 이대로 집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던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잠시도 머물기 싫은 <구역질 나는 집>이라고 말한건 진 심이었던 것이다. 상의 안에 넣어져 있던 총을 꺼내든건 그 때로, 노아의 등을 향해 서 은색의 총구를 겨눈 순간 즉시 수십개의 수행원들이 겨누는 레 일건이 기잉-하고 탄환이 장전된채 내게 모아졌다. 날카롭게 날이선것처럼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수행원들의 임무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이 다. 거기에 반하는 상대는 누구든 죽여 없앨 수 있다. 더구나, 중앙정부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돔 안에 머물고 있는 나 같은 인간의 목숨이라는건 의미조차 없는 것이다. 후계자를 만들어낸 행적따위 이미 위원회의 미움을 사고있는 이상 나한테는 아무런 해당사항 없으니까, "좋아, 가서 죽여 없애. 네가 원하는대로 해. 나는 더 이상 말릴 수 없을테니까 말이야. " 생각보다 훨씬 더 담담하게 목소리가 내 입 안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총을 꺼내든 동시에, 앞서서 걷고있던 노아의 걸음이 멈추었 다. 내 말에 잠시 그대로 꿈쩍않고 있다가 뒤돌아 본 녀석의 얼굴은 뜻 밖에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것이었다. 죽일 듯이 화내던 표정따위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틀림없이 화내고 있었다. 순노부를 되살려 낸것에 대해 미친 듯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치 잠깐 놀려보기라도 한것처럼 말끔하게 표정을 지운 얼굴로 불쑥 말을 내뱉는다. "뭐야, 이제야 겨우 시험해 볼 마음이 들었어? 언제쯤 그걸 나한테 겨눌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 손 끝으로 수행원들이 들고 있던 총을 완전히 아래로 내리게 하고 는 천천히 몸을 돌려서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내 얼굴을 똑 바로 내려다본다. 정말로 이상한 얼굴이었다. 화내고 있는 얼굴도, 웃고 있는 얼굴도, 괴로워하거나 분노에 찬 얼 굴도 아니었다. 뭔가를 아쉬워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왜 저런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걸까, "이 집안에 총은 없었을텐데, 역시 의료센터에서 받아온건가? 쓰이 는 용도는 물론 나를 죽여 없애는 거겠지? 왜 아까 쏘지 않았어? 그건 치명적인 바이러스 캡슐이 들어있는거야. 스치기만 해도 발병 해서 수 분 내로 죽게 돼. 지금 내 손에 신약 같은건 없으니까, 좋 은 기회지? " 바이러스 캡슐이 집어 넣어진 총이라는것까지 알고 있다. 틀림없이 수분전에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몸을 껴안고, 키스했을때부터-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 총을 쥔채, 멍하니 녀석을 보고 있다가 불쑥 말을 내뱉는다. 내 말에 노아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고 있다가 문득 입꼬리를 말 고 웃어보였다. "그래? 나는 네 머릿속이 환히 보이는데 말야. 결심했으면 그걸로 나를 쏴. 그러면 네 형이 살아 돌아와. 죽었던 녀석도 되살려놨으니 까 그걸로 좋을거다. 생명이 얼마까지 유지될는지 모르겠지만 어차 피 인간이란건 죄다 돌연변이 형태로 생겨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 지는거니까 말야. "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원하는걸 말해봐. 그대로 해줄테니까. " "아직 나한테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거야? 너는 정말 못말리겠군. 그 러니까... 그대로 해주겠다,는건 위원회한테서 떨어져주는 조건으로 말이지? " "누구도 다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 뿐이야. " "그게 아니라 무건을 나한테서 구해내고 싶은거 아냐? 털끝하나 다 치게 하지 않고 말야. " ".......그래, 살려내고 싶어. " "어째서? " "나도 몰라.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써서라도 살려내고 싶다고 생 각해. " "그래서 나와 섹스하려고 생각한건가? " "그래. " "그래봤자 달라지는건 아무것도 없었을거야. 내가 저 자식이었다면, 차라리 널 죽였을거다. 살아있는 동안 잠시도 편하지 못할테니까, 죽이지 못할바엔 스스로 죽어 없어지는게 그나마 좀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 "지도자를 처형시키려는 일을 멈추게 해. "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하지? " "너는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지금 여기서 너를 쏘게 되면 후계자는 사라지게 돼. 그걸로 전부 원래자리로 되돌아가게 되니까 말이야. " "아아.. 그렇군. " 새삼 깨달았다는 듯이 감탄을 하면서, 처음보는 부드럽게 입가를 올린 얼굴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미건조하게 말라붙어있던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아무것도 느낄 수 조차 없게 되었다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이 다. 모든 것이 무감각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허상이다. 허상의 세계에서 보고, 말하고 듣는다. 연한 보랏빛의 하늘이 펼쳐져있는 홀로그램의 저녁 풍경처럼 평화 로운 곳이었다. 그 곳이, 눈 앞에서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두갈래로 찢어지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그 안의 현실이 보이기 시 작한다. 가슴이 터질것처럼 되었다. 심장이 뇌로 옮겨진 것 처럼 머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머릿속이 지끈거려서 한손으로 후두부를 누른채 총을 겨누고 다시, 입을 열었다. "순노부는 네 형이야.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줘. 그걸로 좋으니 까. " "....뭐? "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네가 원하는대로, 내키는대로 하면 되는거야. 이제 됐어. " "무슨 소릴 하는거야? "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노아가 문득 눈썹을 찌푸려 보였다. 다시 표정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그걸로 좋다.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돌연변이의 형태로 태어난다. 붉은 알껍질을 뒤집어쓴채 흘러나오는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올바른 인간이 아니다. 알을 낳는 인간들 역시 그 알을 자신의 몸에 기생시키는 <숙주>일 뿐이다. 인간을 내놓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인간이 아닌 생물체를 몸 안에서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나약한 기분이 든다. 예전에 병약했던 어머니가 나를 쓰다듬던 손끝처럼 슬프다는 느낌 이 든다. 자신이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붉은 알의 형태로 흘러 떨어지는 작은 생물체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도- 잘 알 수 없는 '책임' 같은것을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이 녀석을 죽이지 못한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사실은 그런 것이다. 노아가 말한 것이 옳았다. 나는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 따위 전혀 없었던 것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들고 있던 총을 머리에 대고 그대로 총신 아 래의 버튼을 눌렀다. 순간, 희미한 빛의 점멸과 몸 속으로 뜨거운 총탄들이 날카로운 소 리를 내면서 와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최후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괴로움이나, 절망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온함과도 닮은 푸른 벨벳처럼 빛나는 부드러운 밤하늘이었다. "온통 새빨갛게 보이는 곳이었어. "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것처럼 몸이 나른하다. 차갑게 이마를 매만지는 것은 커다란 손이다. 기분 좋을만큼 차가운 손끝으로 가만히 머리칼을 쓰다듬어준다. 낮고 음울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노아의 목소리였다. 이 녀석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만 해댄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떴다. 이 곳은 이상하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곳이다. 들어본적도 없었다. 바닥도 없었고, 천장도 보이지 않았다. 벽도 없었고 눈에 보이는거라고는 온통 새하얀 빛이 전부였다. 누워있는 내 위로 상체를 조금 숙인채 덩치 큰 녀석이 입가를 느슨 하게 해서 웃고 있는게 보였다. 아아.. 그렇다. 이 녀석은 처음 보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류, 들어봐. 재밌을거야. " 멍하니 노아의 얼굴을 쳐다보는 사이에, 웃음을 품은 목소리가 다 시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여진다. "투명한 점액막이 끈끈하게 손에 휘감겨서 기분 나빴다구. 너무 적 막하고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어. " "......너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 이상하다. 소리내서 말하지 않았는데도, 틀림없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내 목소리가 되어서 흘러나왔다. "무슨 말을 하고 있어? " 다시, 내 머릿속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팔을 내밀어서 비스듬하게 비쳐보이는 노아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내 의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 었다. 아아, 그렇지. 그제서야 간신히 수긍을 한다. 나는 총에 맞았다. 내가 레일건으로 내 머리를 쐈으니까. 그리고 틀림없이 수행원들이 쏘는 총까지 몸에 맞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꿈이다. 눈 앞에 보이는 부드러운 웃음을 입가에 달고있는 노아도, 내가 원하는대로의 환상같은 것이다. "너무 적막하고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어. 시간은 끝없이 흐르고 이 런 시간이 영원히 계속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미칠것처럼 되 었지. 왜 나는 여기에 있게 된 걸까, 이 곳에 있기 전까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건 아무리 해도 도무지 생각이 안났단 말야." 생각에 잠긴 눈으로 잠시 허공을 보고 있다가, 녀석이 다시 내 얼 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어쩐지 침대 위에서 노아를 처음 봤을때가 생각났다. 목덜미까지 닿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을 하고, 작고 단정한 얼굴 로 내가 누워있던 침대 머리 맡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어느날 젤라틴 덩어리로 된 공간이 짜부러질 것처 럼 꿈틀거리기 시작했어. 너무 심하게 흔들려서 깜짝 놀랐다구. 벽 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 다음에 눈을 떴는데 새빨간 벽 대신에 갑자 기 <네 얼굴>이 보였어. 가슴께라던가 손에 '피'가 잔뜩 묻어서.. 진 짜 볼만했지. " "새빨간 벽이라고...? 내 얼굴이 보여? " "그래. 만져보고 싶어서 손을 내밀어 봤는데 빌어먹을 <막>이 있었 어. 그때부터 내가 어디에서 왔을까,하는 따위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었어. 대신에 널 생각했지. 이 녀석은 뭘까, 이상한 생김새다, 만져보면 어떤 감촉일까,하고 말야. 실험실의 단단한 유리부스 위로 네 얼굴이 보이기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틀림없이 나한테로 와줄거라고 믿었으니까. 지칠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단 말이야." 유리부스... 젤라틴의 막. 그제야, 이 녀석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지- 나한테 무슨 말을 하 고 있는건지 깨달았다. 두 번째 알이 흘러나왔을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다. 그 당사자가, 또렷하게 자신이 본 것을 기억해 내서 내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떠올리고 나자, 뭔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녀석은 어떻게 그런걸 기억하고 있는걸까. <알>이었을때를 기억해 내고 그 감정까지 잊지 않고 있는 인간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건가. "내가 그때 직접 네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지 않았다면 너는 내 앞 에 언제까지든 나타나지 않았을거야. 그렇지? " 비난 당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부드러운 어조로 느릿느릿하게 말을 잇는다. "나를 찾아오지 않는건 너한테 이미 다른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었 어. 저 끈적거리는 액체 속에 갇혀있을 때 봤던- 저 녀석 때문인건 가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미쳐버릴 것 같더군. 아아, 와주지 않 는다면 직접 찾아가 주자고 결심했지. 찾아가서 둘 다 죽여주겠다 고 말이야. 너와 무건을. " 심장이 뭔가에 세게 붙잡힌 듯이 고통스러워졌다. 날카로운 손톱이 박혀있는 손이 집어 삼켜져서, 그것으로 있는 힘 껏 움켜쥐인다. "하지만 역시 나는 널 죽일 수 없어. 널 갖고 싶었던 것 뿐이야. 네 가 없어진다면 아무런 의미 없어. 어차피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고 자라는 기생충일 뿐이라구.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더구나 나같 은 기형은 특히 말야. 그러니까 네가 스스로 죽을 필요는 없었단 말이야. 넌 정말이지 날 미치게 만들어. " 쓰게 웃고, 도무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자신과 같은 기형, '알'의 형태로 태어나는 인간들을 증오하는 말을 한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처럼.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은 인간을 원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줄곧. 녀석이 내 머리를 바치고 있던 무릎을 빼내고, 엎드린채 내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해 왔다. 가까이 다가왔다가 조금 멀어진 얼굴은 어딘지 뭔가 기뻐하는것처 럼 보이기도 했다. "나류,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될거야, 그때는 네 옆에 아무도 없을거 야. 내가 있을테니까, 날 알아봐 줘, 돌아보고 사랑해 줘. "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져 간다. 뭔가-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숨을 몰아쉬어 봤지만 잘 되지 않았 다. 괴로움과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질식할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정에 짖눌려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또다시, 빛의 점멸로 더 이상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계속...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은 조그맣고 말랑말랑한 손이다. 이 녀석은, 입술을 뾰죽하게 만들어서 칭얼대거나 다리에 감겨들거 나 하면서 끊임없이 귀찮게 구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붉게 비쳐보이는 하늘을 멍 하니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틈에, 작게 옷깃이 당겨진다. "나류~ 멀리 가면 안돼. 무건이 저기에 서서 보고 있어. " 걱정스러운 듯이 올려다보는 눈이 말끄러미 내 얼굴을 살핀다. 어쩐지 웃음이 나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순노부가 조그만 손으 로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너무 멀리 가면, 집으로 못돌아 가게 될지도 몰라. " 이건 무건이 이 녀석한테 해준 말이다. 어째서 저런 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걸까, 뒤돌아 보자 홀로그램의 출입구가 손톱 크기 만큼 떨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너무 멀리 와버렸다. 무릎에 연한 회색으로 바싹 마른 풀잎이 부딪혀와서 문득 내려다 보고 그제서야 다리에 붉게 생채기가 생긴걸 깨닫는다. 깜짝 놀라서 순노부를 자세히 살펴보자, 팔뚝과 뺨에까지 생채기가 보였다. 미안해져서 조그맣게 사과한다. "돌아갈까. " 내 말에 순노부가 안심한 듯이 조그만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웃었 다. 내가 어떻게 깨어날 수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른다. 잠결에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었고 눈을 떴을때는 침대 위였 다. 침대 앞의, 하얀 모피가 깔린 푹신한 소파 위로는 일우가 앉아 있 었고 가늘게 뜬 눈꺼풀 너머로 분명하게 창으로 흘러 들어온 자연 광이 스며들고 있었다. 얇은 피부막 너머로 보이는 희고 붉은 강렬한 색조의 움직임. 틀림없이 오랜만의 강한 햇살이 돔 밖의 두꺼운 구름을 뚫고 새어 들어온 것이다. 아직 오전의 강렬한 햇살이었다. 침실 안에서의 파장이 이 정도쯤 되는 전자기파가 흘러나올때는 실 외 출입은 안된다. 문득 어렸을 때 들었던 주의를 다시금 생각해 낸뒤 그런 주의를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떠올리고 나도 모르게 입가를 잡아 당겨서 웃었 다. 정말이지 걱정이 많은 남자다. 저런 기계 조각같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어떻게 된거야? " 노려보듯이 이쪽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신음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억눌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머리칼은 평소보다 훨씬 더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옷도 제복 이 아니라 푸른색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다리를 아무렇게나 벌 린채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얼굴이 마르고 눈가가 매섭게 보인다. 반쯤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잠자코 쳐다보자 일우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곳에 도착하고 정확하게 32시간 반만에 일어나 주는구나. 아무리 깨워도 안일어나서 곤란했단 말야, 지금 나는 의사를 부를 수도 의료센터까지 널 데려갈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오래 잔건가 하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가 불쑥 말을 입밖 에 내보려고 했다. <휴가도 아닐텐데 이 시간에 여기에 있다니 정말 제멋대로인 남자 다>하고- 하지만, 이상하게 소리가 되어서 나오지 않는다. 목에 손을 얹고 애를 써보자 쉭쉭거리는- 공기 주머니에서 억지로 공기를 비틀어 빼내는것같은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소리가 안나와?? "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남자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 켜 손으로 내 턱을 쥐고 유심히 성대 부근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아무런 상처가 없는걸 확인했었는데- 메시지 때 문에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그 날 와봤단 말야. 그나마 나같은 놈은 아무도 신경을 안쓴다고 해봐도 일단은 근신처분을 어겼으니 까 수배가 돼있어. 여기까지 오는데 엄청 애를 먹었다구. " <근신처분>을 어기고, 그것 때문에 수배까지 되어있다니, 그런 녀석이 태연한 얼굴로 이런 곳에 와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제 어쩔셈인건가-하고 물끄러미 쳐다보자 내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소파 대신 침대 한쪽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할지 가늠해 보는것처럼 잠시 미간을 모은채 내 얼굴을 뚫어질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중앙정부에서 감시하고 있던 노아의 생체 에너지 활동이 멈췄어" 노아의 생체 에너지.... 바로 코 앞에 앉아있는 녀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가하고 일순 의아해져서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문득 어깨 를 잡혔다. 닿아있는 피부의 감촉이 싫어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누르고 있던 손을 세게 쳐낸 뒤에는 맥없이 떨어져나간 손을 놀란 듯이 떨어뜨 리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게 되었다. 내 시선에 일우가 어딘지 난감한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넌 죽은 시체들 틈에 있었어. 수행원 12 명이 이 집 출입구 앞에서 시체로 발견됐다구. 게다가 노아는 생체 에너지가 끊긴채로 '행방불명'이야.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 에 수행원들의 생체 에너지가 끊어진 것 역시 중앙정부에 그대로 보고 되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수행원과 후계자의 생 체 에너지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이 곳은 <중앙정부> 의 공격 대상이 되었단 말이야. 정신 차려, 나류! 멍하니 있다가는 이대로 끝장나게 돼. 네가 아끼는 저 조그만 놈까지 잘못될 수 있 다는 말이야. " 녀석이 턱짓을 해와서, 돌아보자 넓찍한 침대 한쪽으로 작게 누워 있는 놈이 보였다. 순노부가 맨발을 해서는 까맣고 노란 털뭉치처럼 웅크린채 자고 있 었다. "아주 잠깐은 괜찮을거야. 하루나 이틀쯤은, 정찰대가 이 곳을 지키 고 있으니까. 무건이 기른 군대라구. 최대한 중앙정부의 공격에서 이 곳을 방어해 줄거야. 게다가 유리돔 때문에 내부 공격은 중앙정 부에 오히려 치명타가 되니까- 돔이 손상되거나 하면 큰일이니까 말이지. 정면으로 공격해 오면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그건 우선 차 치하고, 당장 문제가 생겼어. "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노아의 생체 에너지 활동이 사라졌다- "후계자를 놓쳤지만 놈들은 원래 예정대로 오늘 무건을 처형시킬 작정이야. 머저리같은 놈들- 뒷수습이 걱정되니까 그대로 화근을 죽여 없앨 작정인거다. 어찌됐든 덕분에 일이 급하게 됐어. " 일우가 이 곳에 와있는건 뭔가 위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건은 이 곳에 돌아오지 않는다. 중앙정부로부터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말들을 나열해 보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기분 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다. -꿈일리 없었다.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눈을 뜨면 모두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서 이 제 더 이상 괴로운 일은 겪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 따위 사실은 절대로 있을리 없는 것이다.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손을 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 의아한 눈초리로 일우가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멍하니 일우를 쳐다보 고 있었다. 머리에 상처 자리가 없었다- 나는 총을 쏘았다. 분명히 상의에 넣어두었던 총을 꺼내서, 한 발을 내 머리에 쏘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런걸 깨닫고 아연해졌다. 순식간에 뭔가가 세게 내리쳐져서 머릿속이 완전히 마비된것같은 기묘한 기분을 느낀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만큼 온 몸이 떨려왔다. 그리고- 눈을 굳게 감고 아무것도 제대로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다. 노아의 생체 활동이 사라졌다는건, 그러니까 녀석이 생체 탐지센서 가 작동되는 모든 곳에서 뇌파 활동이 완전히 멈추었다는 뜻이다. 노아의 뇌파 활동이 왜 정지 되었는지. 왜 노아가 사라져 버렸는지, 왜 내가 지금 살아있는지, 저때 봤던 노아가 무슨 말을 해왔는지,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지금 내가 입을 열어서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깨어난 날은 무건의 처형이 있는 날이었다. 후계자가 없어지게 되면서 지도자의 재판이 없던 것으로 되었느냐 하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 모양으로 그날 아침까지 회의를 계속하던 위원회가 결국 원래 예정대로 지도자를 처형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염도와 산소가 풍부한 수족관 속을 한가롭게 배를 드러낸채 지나가 는 커다란 해수어 떼를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투명한 대형 아크릴 속으로 새파란 물결이 일렁거린다. 연한 녹색에서 얼어붙을것처럼 차가운 푸른빛으로 시시각각 움직이 는 물결을 따라 커다란 물고기떼가 이동을 하고 있었다.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만큼 넓은 인공 바다다. 푸른색의 물결을 그대로 비쳐내는 복도를 저만큼 달려간 순노부가 말끄러미 고개를 들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큰 돌고래 한 마리를 넋 을 잃고 보고 있었다. 등부분이 연한 산호색을 띄고있는 주둥이가 유별나게 뾰죽한 돌고 래였는데 투명한 타원형으로 된 복도를 재주 부리듯이 한번 휘감고 지나가는 참이었다. 위원회가 지도자를 처형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가지 이유뿐이라고 했다. 중앙정부에 지도자가 없어지는것보다 위원회의 안위가 더 우선시 되었기 때문이다.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지도자가 다시 깨어나게 되면 지도자를 재판 한 <위원회>가 위험해진다라고 의견이 모아진 것 같다. 지도자가 중앙정부의 관리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어리 석게도 놈들은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다. 후계자가 사라져 버렸다는걸 알면서도 중앙정부의 지도자를 그대로 처형 시키려고 한다.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한건가, 연방정부에 지도자를 없앤다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지도자가 필요없는 정부로 만들겠다는건가, 틀림없이 수상들은 지도자를 처형시키는 일을 내키지 않아 할 것이 다 (지도자를 재판한 일로 가상 회의,라는 것까지 했었으니까) 수상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위원회는 지도자를 처형시키는 일 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나류-! " 등뒤로 이름을 크게 불려서 돌아보자 여전히 청바지와 셔츠 차림으 로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흐트린채 일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 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녀석은 힐끗 순노부가 있는 쪽을 돌아보고 나서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이런데서 뭘하고 있는거야? 어린애 데리고 다니면서 장난치고 있 을틈이 없단 말야. " 찾아다니기라도 한것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곤 흐트러져있는 머리칼 을 초조해하는 손끝으로 쓸어올린다. 맨션 주위로는 정찰대가 만든 에너지 방어막이 둥그렇게 둘러쳐져 있었다. 이것으로 중앙정부에서 들어오는 정찰대를 막는 것이다. 예전처럼 맨션 부근으로 보이지 않게끔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맨션 밖으로 나가면 푸른 빛으로 반짝거리는 비행선들이 공중에 빽 빽하게 떠있는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사실은 여유부리고 있을틈 따윈 조금도 없었다. 바로 몇시간 후면 무건의 처형이다. "지금부터 출발해서 중앙정부의 내부로 들어가게 될거야. 처형장은 건물의 가장 중심부 쪽에 있어. 원형으로 된 기둥 모양의 방이다. 중앙정부의 내부로 들어가는것도 문제지만 처형장은 특히 출입이 불가능해. 의사 한명과 사형집행인 2명, 그리고 수상과 위원회밖에 출입이 안되니까, 무건이 만들어놓은 정찰대는 이미 모조리 노출이 되어있기 때문에 놈들을 데리고 무작정 중앙정부까지 들어가는것도 불가능하단 말야, 지금쯤 위원회 놈들은 공격에 대처하고 있을테고 게다가 이쪽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따위의 규모도 못 되니까. " 공격이라고 해봐도 돔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격렬한 싸움은 불가능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맨션이 온전히 제 자리에 붙어있는지도 모 르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중앙정부를 공격한다고 해봐도 지금 규모로는 중앙정 부에 접근하는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딘지 난감한 기분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자 일우가 뭔가 할 말을 고르는것처럼 눈썹을 조금 찌푸려 보였다. "정찰대로 무작정 뚫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해졌고, 무기를 가지고 중앙정부로 몰래 숨어든다고 해도 도중에 체포될 가 능성이 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만 약 무건이 잘못되게 되면, 오늘로 끝이니까. 중앙정부로 가면 어쩌 면 무건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일이 잘못돼서 형을 집 행받는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말이야, 거기서 다시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을런지는 확신시켜 줄 수 없지만- 여 기에 남던지 아니면 같이 중앙정부로 들어가던지 네가 선택하도록 해. 그 곳까지 널 데려다 줄 수는 있으니까. " 정찰대로 급습하듯이 해서 놈들을 놀라게 하기란 도무지 불가능할 것이다. 일우의 말처럼 이미 위원회는 중앙정부를 배신한 정찰대가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까, 무기를 가지고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 따위 없을 것 이다. 어차피 이 곳에 남아있어봤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위험하더라도 찾아가서 저 남자의 모습이라도 봐두자고 생각했다. 무건이 죽게 되면 어차피 모든 것이 다 끝나게 된다. 돔 밖으로 나가서 죽든 체포된 뒤에 처형되든,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어느 틈엔가 가만히 멈춰서 서 얼굴을 기울리며 이 쪽을 유심히 보고 있는 순노부를 손짓으로 불렀다.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될거라고는 무건도 생각 해보지 못했을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범법자가 되어서 재판 받았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순노부의 이틀동안 한번도 갈아입지 않은 지저분하 게 때가 탄 파랑색의 옷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노란 꽃무늬가 들어간 셔츠 앞부분은 언제 정원에서 뒹굴었는지 아 주 까맣게 흙이 묻었다. 꼭 붙잡고 있는 손도 끈적거렸고 조그만 맨발도 흙이 말라붙어서 이상한 회갈색으로 보였다. 뺨에도 하얀 음식 얼룩이 묻어서 손가락으로 지우려고 하자 얼굴을 이상한 모양으로 찡그렸다. 놔두고 갈지 아니면 데리고 갈지 잠시 고민해 보다가 그냥 데리고 가기로 했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 순노부의 발을 대충 내 하의에 대고 문질러 닦은 다음 벌써 며칠전에 주머니 속에다 넣어뒀던 꼬깃꼬깃 하게 구겨진 작은 신을 꺼낸뒤 녀석의 발에다 신겨주었다. 이제 됐다고- 허리를 펴고 일어난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 면서 일우에게 대답하자, 어딘지 알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고 있던 남자는 문득 기가 차다는 듯이 <정말이지 태평한 놈이다>하고 중얼거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통신 기계로 홀로 그램을 불러들여 '곧 출발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계속..